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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기행

휙 둘러보는 데도 두세 시간 걸리는 자금성





휙 둘러보는 데도 두세 시간 걸리는 자금성

자금성, 어떻게 써야 할까? 책 한 권의 원고라면 쓸 수 있겠지만 아주 짧은 글로 표현하는 건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글밖에 되지 않는다. 자금성을 글로 쓴다는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주마간산’의 글이라도 써야 한다는 건 여행자로서의 책무가 아닐까 싶다.

금수교

자금성. 예전 이곳에 왔을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내리쬐는 햇빛과 후덥지근한 더위에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삼면이 포위된 듯한 오문은 무언가 모를 위압감을 주었고 이 느낌은 궁전의 북쪽문인 신무문을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만 위로가 되었던 건, 문을 지날 때마다 가슴 속까지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는 것이었다.

태화문 옆의 정도문

이번에는 매서운 추위가 문제였다. 장대한 규모에 숨어 있는 삭막함, 권위에 가득 찬 건물들은 이곳이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라 신만이 사는 곳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금수교와 태화문. 태화문은 전조 삼대전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의 대문이다.

태화전 일대

자금성은 원나라 대도의 궁성터 위에 명나라 때 새롭게 건조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지금의 남경에 도읍을 정했다. 그러나 후에 왕위를 물려받은 장손 주윤문이 4째 아들인 주체의 반란으로 왕위를 찬탈 당하게 된다. 왕위를 찬탈한 이가 바로 영락제다.

태화전 광장

영락제는 당초 북평(북경)의 연왕이었는데 왕위 찬탈 후 북평으로 천도하고 이름을 북경으로 고쳤다. 1407년, 영락제는 자금성의 건설을 명하게 되고 이후 14년간 100만 명의 인부가 이 공사에 동원되었다. 이리하여 자금성은 명, 청 500여 년간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전이 되었다.

태화전. 조정의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던 장소로 중국에서 현존하는 고건축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다. 전체 길이가 11칸에 60.1미터, 측면은 5칸에 33.3미터, 높이가  35.05미터 정도라고 한다.

태화전 내부 전경

태화문을 들어서니 중국 최대의 건물이라는 태화전이 웅장한 규모로 서 있다. 태화전의 앞마당은 병사 9만 명이 모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뜰이다. 이 장대한 궁궐을 카프카는 <황제의 메시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또 수많은 뜰을 건너가야 한다. 그 많은 뜰을 다 지났다 해도 새로운 계단을 만나게 되고, 다시 뜰을 지나고 또 다시 다른 궁전을 만나게 된다. 끝없이 몇 백 년, 몇 천 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황제가 파견한 사절은 결코 그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사실 자금성을 가본 이라면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할 것이다.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장대하지만 감옥 같은 궁전, 그것이 자금성일지도 모른다. 권력을 가진 자는 황금빛 궁전 안에서 결코 권력의 고독과 무상을 깨닫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태화전 앞의 도량형기

태화전 앞의 해시계


화재 진압용 물통. 지금은 물이 없지만 옛날에는 불을 끄기 위해 항상 물을 채워놓았다고 한다.


태화전을 비롯한 자금성 일대는 후원을 제외하고는 나무가 전혀 없다. 권위를 드러내기 위함도 있겠지만 실은 암살자가 나무에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닥만 해도 그렇다. 땅 밑의 침입자를 맡기 위해 40여 장의 벽돌로 겹겹이 쌓았다고 한다.


중화전과 보화전.

자료에 의하면 자금성은 남북 961m, 동서가 753m, 면적이 723,633㎡이다. 단순히 숫자로서는 실감이 나지 않지만 자금성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남쪽의 천안문에서 북쪽의 신무문까지 일직선으로 통과하는 데만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보면 그 규모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보화전의 쌍룡석계. 청대에 과거의 최종시험인 전시를 보던 보화전 뒤편에 있다. 길이 16.57m, 폭 3.07m, 두께 1.7m라고 한다. 무게는 250톤이다. 장정 2만여 명이 동원되어 육지에서 끄는 배인 한선을 이용해 운반했으며, 땅이 얼지 않았을 때는 사륜마차로 운반했다고 한다. 돌이 채석된 방산현에서 북경까지는 100여 거리로 28일 걸려서 옮겼다고 한다.

일반에게 개방되지 않은 것까지 모두 합하면 아마 며칠, 아니 몇 달을 두고도 찬찬히 둘러보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자금성 내에는 모두 8백여 개의 건축물과 9천여 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으로 구성된 후삼궁의 주요 건물로 황제와 황후가 생활하는 공간이다.

제일 먼저 마주치는 천안문에서 일직선으로 오문, 금수교, 태화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건청문, 건천궁, 교태전, 곤녕궁, 어화원을 거쳐 신무문으로 빠져나오게 된다. 여기에서 자금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산까지 오른다면 족히 반나절 이상은 잡아야 된다.

건청궁 내부 전경

어화원의 만춘정 어화원은 자금성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황제가 휴식하던 원림이다. 중앙에는 흠안전이 있고 양측에 부벽정과 징서정, 만춘정과 천수정 등이 있다.

어화원의 부벽정

어화원의 여경정



이날 여행자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칭다오로 가는 비행기가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건성으로 찍고 전에 보았던 전각들을 대충 보았음에도 신무문을 빠져나오니 거의 두 시간이 소요되었다.

경산. 이자성의 군대에 쫓긴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처와 자식을 살해하고 이곳에서 자결하였다. '매산'이라고도 하는데 '매'는 석탄을 의미한다.  북경이 적군에게 둘러싸였을 때 연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석탄으로 산을 쌓고 흙으로 덮었다고 한다. 높이 92m에 불과한 인공산이지만 이곳에 서면 자금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물며 글이야 오죽하겠는가. 태화전 일대만 해도 몇 개의 글로 부족할 터, 글도 건성으로 눈으로 보여주는 풍경만 전할 수밖에 없다. 언제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자금성 일대를 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드는 건 여행자의 감성이 지나친 것일까?


10m가 넘는 성벽과 50m의 폭으로 깊게 파인 해자로 철저히 고립되었던 자금성은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에야 비로소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신무문에는 ‘고궁박물관’이라고 적혀 있다. 수백 년 동안 권력의 중심으로 철저히 고립되었던 자금성은 한해 수백만 명이 찾음으로 인해 비로소 허망한 권력과 깊은 고독에서 벗어났는지도 모른다.

신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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