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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무너진 옛 절터, 마지막 단풍은 붉어라.



 


무너진 옛 절터,
마지막 단풍은 붉어라. 진전사지



양양군 강현면 석교리에 이르면  길은 진전사지로 이어진다. 번잡한 동해안과는 달리 이곳은 한적한 곳이다. 석교리에서 시멘트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계곡 옆의 산등성이에 제법 너른 터를 볼 수 있다. 길가에서 언뜻 보이는 삼층석탑은 까만 몸빛을 띠며 다부지게 서 있다.

 

폐사지로 가는 마음은 늘 고요하다. 딱히 아름다운 풍경도, 감동을 줄 법한 볼거리도 없으면서 늘 무언가에 홀린 듯 옛 절터를 찾게 된다. 아무것도 없음으로 인해 오히려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폐사지여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석탑 하나, 부도 하나에 스민 옛 고승들의 발자취를 그곳에서 돌이켜 본다.

 

진전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남아 있는 문화재라곤 국보 제122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439호인 부도가 전부다. 이 두 문화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진전사를 창건한 도의선사가 남긴 유물이다.

 

도의선사는 당시 교종이 절대적이었던 신라에 선종을 소개한 인물이다. ‘중국에 달마가 있었다면 신라에는 도의선사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신라 남종선의 중심인물이었다. 경전이나 해석하고 염불을 외우던 당시 왕권 불교인 교종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평등과 인간 본연의 품성을 중시한 그의 사상은 기존의 승려들에게 배척을 받게 된다. 그런 도의선사가 뜻을 품고 은신한 곳이 진전사다.

 

그의 선사상은 염거화상에게 전해지고 다시 보조선사 체징에 이르러 맥을 잇게 된다. 체징은 구산선문 중 하나인 전남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를 창건하고 선종을 펼친 분이다. 이처럼 진전사지는 새로운 사상인 선종이 그 싹을 틔운 곳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삼층석탑은 한눈에 보아도 걸작이다. 천년의 세월에 무디어지고 훼손된 곳이 더러 보이지만 다부진 몸매에 화려한 조각을 지닌 아름다운 탑이다. 튼실한 2층의 기단부 위에 앉은 3층의 탑이 날렵하다.

 

이중의 기단부 1층에는 천의를 날리고 있는 비천상이 2구씩 조각되어 있다. 2층 기단의 각 면에 2구씩 조각된 생동감 있는 팔부신중은 구름 위에 앉아 무기를 들고 있다. 3층인 석탑의 1층 몸돌(탑신)에는 결가부좌한 여래좌상이 사면에 1구씩 모셔져 있다.

 

석탑 주위로는 휑한 빈터만 남아 있다. 붉은 단풍과 노란 낙엽송 사이로 아직도 초록빛을 띠고 있는 소나무들은 변함없다. 화려했던 교종에서 새로운 시대의 등불이 될 선종이 마지막 비상을 위해 그 붉음을 태우는 듯하다.

 

삼층석탑에서 얼마간 오르면 둔전저수지가 있다. 저수지에서 새로 지은 산사 곁의 솔숲을 들어서면 부도 한 기가 있다. 도의선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로 이제껏 봐온 부도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부도는 연꽃 받침대 위에 팔각당을 얹은 형식이다. 이에 비해 진전사지 부도는 석탑에서 보이는 2중 기단부 위에 팔각당 형식의 몸돌을 올려놓았다. 이는 부도가 구체화되기 전의 초기 모습으로 파악된다.


원효, 의상 등의 고승들이 부도가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부도는 선종이 등장하고 난 후에야 발생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自心卽佛’인 선종에서 고승의 죽음은 곧 부처의 죽음과 같다고 여겨 다비 후 사리를 모시면서 부도가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다.

 

진전사지 부도는 이런 맥락에서 처음 시도되는 부도로 보고 받침대는 석탑의 양식에서 가져오고, 탑신부의 팔각당 양식은 당나라의 사리탑에서 그 원형을 빌려왔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도의선사의 제자인 염거화상의 부도와, 염거화상의 제자인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를 보면 그 흐름을 알 수 있다.

 

부도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저수지에서 잠시 쉬었다. 둔전계곡을 막은 저수지가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깊어가는 가을은 그마저도 너그럽게 하였다. 두 시간여를 머물렀지만 이 중요한 유적지를 찾는 이는 없었다. 폐사지는 그래서 폐사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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