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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풍류와 멋

폭포 위, 그림처럼 자리한 만휴정


 

폭포 위, 그림처럼 자리한 만휴정


안동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길안면 묵계리에 이른다. 폐교된 묵계 초등학교를 지나면 묵계서원 입구이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다리를 건너면 한적한 시골마을이 나온다. 오래된 흙벽으로 된 집들과 붉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마을의 끝에 대여섯 대의 차를 세울 수 있는 작은 주차장이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임도는 걷기에 좋았다. 어디서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계곡 아래로 내려갔더니 암반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정자 아래로 폭포수가 떨어진다. 선경이 따로 없다. 그 위치 설정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만휴정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집안 행사로 책자를 보던 중 아주 보기 드문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장손인 사촌 형한테 물어 봤더니 집안의 윗대 조상이 세운 만휴정이라고 하였다. 위치를 묻자 안동 길안천이라고 하였다. 만휴정의 빼어난 경관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번 안동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 문득 만휴정이 떠올랐다. 망설일 이유 없이 만휴정을 찾아 나섰다.

 

폭포 위의 암반을 흐르는 계류를 앞두고 산기슭에 위치한 만휴정은 경관이 아주 훌륭하다. 정자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장관도 말할 나위 없지만, 다리를 건너야 정자로 들어갈 수 있는 설정이 긴장감을 준다. 그뿐인가. 정자 위쪽의 계곡에는 족히 수백 명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가 있어 탁족을 하기에 그만이다. 폭포와 계류, 너럭바위가 조화를 이룬 명승지인 셈이다.


 

만휴정은 조선시대의 문신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 말년에 독서와 사색을 위해 지은 별서정원으로 연산군 6년인 1500년에 지었다. 안동 소산에서 태어난 그는 점필재 김종직 등과 교유하였으며 50세가 넘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등의 관직을 하였으나,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대사간에 올라 간신들을 탄핵하다가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이 정자를 짓고 ‘쌍청헌’이라 부르다가 후에 ‘만휴정’으로 바꾸었다.


 

동남향으로 자리한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소담한 규모이다.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어 학문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앞면은 삼면이 개방된 누마루 형식으로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 벽면에는 조선 전기의 청백리로 뽑혔던 그의 가르침이 쓰여 있다. ‘내 집에 보물이 있다면 오직 맑고 깨끗함 뿐이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그가 평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글귀이다.

 

마루에 앉아 흐르는 계류를 내려다보았다. 수량이 적어 웅장한 멋은 없지만 졸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오히려 가을에 제격이다. 다리를 건너 너럭바위로 향했다. 수백 명은 족히 앉아 풍류를 즐길 정도로 넓다. 바위에 앉아 있으니 사방이 고요하다.

 

만휴, 이래저래 바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슬로우 시티, 슬로우 푸드 등 느린 것을 외치는 요즈음 세태에 비해 우리 선조들은 이미 그것을 삶의 방향으로 삼고 살았던 것이다.

 

“아, 정말 여기에 살고 싶다. 종친회에 이야기해서 우리가 관리한다고 하면 안 될까?” 좀처럼 이런 말을 하지 않는 아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자 아래 바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란 큰 글씨를 새겨 놓았다. 만휴정 원림은 지난 3월 18일 문화재청에 의해 포항 용계정과 덕동숲, 봉화 도암정 원림과 더불어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 예고되었다. 김계행은 한때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큰 화를 면하였다. 숙종 32년인 1706년에 지방 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인근에 묵계서원을 짓고 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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