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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하늘과 땅 사이 미륵세상을 꿈꾸다. 김제 금산사


 

하늘과 땅 사이 호남 미륵신앙의 도량. 김제 금산사


금산사는 한때 불국사와 더불어 수학여행이나 단체 관광의 필수 코스였다. 근래에는 모악산을 중심으로 종교인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규모가 장대하고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금산사는 답사 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여행자도 이번이 네 번째 방문이다.

 

김제 사람들이 ‘징게맹게 외배미들’이라 부르는 김제는 ‘김제 만경 너른 들’을 자랑한다.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나 산 한 자락이 있게 마련인데 이곳 김제는 가없이 펼쳐진 평야지대로 땅과 하늘이 맞닿은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근래 복원된 대적광전. 보물 제476호였던 옛 건물은 198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도저히 산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곳의 동쪽에 우뚝 솟은 산 하나가 있다. 해발 793m의 모악산이 그것이다. 모악산은 예로부터 지역 사람들에게 신성시 되는 산으로 금산사, 귀신사 등 여러 절을 거느렸으며 계룡산 다음으로 토착종교 집단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대장전. 원래 목탑이 변형된 불전으로 지붕 용마루에 목탑의 흔적인 복발과 보주(사진 가운데 솟은 부분)가 남아 있다. 보물 제827호. 석등(보물 제828호)

모악산과 금산사라는 이름은 원래 큰 산을 뜻하는 엄뫼, 큼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엄뫼는 ‘어머니의 뫼’라는 의미로 한자 모악母岳으로 바뀌었고, 큼뫼의 큼은 금으로, 뫼는 산으로 적게 되었다고 한다.

 육각다층석탑. 보기 드문 석탑으로 점판암으로 만들었다. 보물 제27호.

모악산 남쪽 자락에 깃든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인 599년에 처음 지어졌다. 당시에는 작은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하나 신라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미륵전.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법당으로 내부에는 미륵삼존입불이 있다. 국보 제62호.

호남 미륵신앙의 도량인 금산사는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을 비롯해 수많은 전각과 당간지주, 석종, 석탑 등의 보물과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고려 시대 문종 33년인 1079년에 주지로 부임한 혜덕왕사가 절을 중창할 당시에는 88당 711칸의 규모였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놀랍다. 전각이 많이 사라진 지금도 절 마당에 서면 화려했던 옛 영화를 가늠할 수 있다.

 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과 석련대(보물 제23호).

금산사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 있다. 바로 후백제의 왕 견(진)훤이다. 견훤은 말년에 맏아들 신검대신 넷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다. 이에 신검과 양검, 용검이 금강을 죽인 후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였다.

 방등계단(송대)과 석종(보물 제26호), 오층석탑(보물 제25호). 방등계단은 양산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마찬가지로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곳이자 수계의식을 하는 계단으로 율종사찰이 갖는 독특한 유물이다.

석 달 동안 유폐생활을 하던 견훤은 감시하던 이들에게 술을 먹이고 지금의 나주인 금성으로 도망쳐 왕건에게 투항하게 된다. 견훤은 왕건에게 자기 아들을 쳐줄 것을 청하게 되고 결국 왕건이 후백제를 치고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그러나 견훤은 울화로 등창이 나서 논산군 여산의 황산사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스스로 미륵임을 자처했던 후백제의 왕 견훤에게는 너무나 씁쓸한 인생의 말로였다.

석인상. 계단 둘레에는 사천왕상을 비롯한 기이한 모양의 석인상들이 배치되었다.

 

산문을 나설려는 차에 아무리 찾아도 예전의 석성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돌무더기만 있을 뿐이었다. 관리소에 그 연유를 물으니 얼마 전 군용트럭이 석성 아래를 통과하다 홍예문 상단에 걸리는 바람에 무너져서 지금은 복원 중에 있다고 하였다. 옆에 대로가 있음에도 굳이 홍예문 아래를 군용트럭이 왜 지나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한때 절 입구에 있어 금산사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홍예문이었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견훤이 쌓았다하여 견훤석성으로 불리기도 하던 석성문은 후대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금산사에서 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실 금산사를 글로 쓰자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 금산사를 네 번째로 방문한 뒤에도 두 달 동안 글을 쓰지 못한 것도 괜한 노파심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현세에서 행복하지 못한 민중들이 수천 년 동안 꿈꿔온 이상 세계, 미륵세상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에 대한 자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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