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자의 풍류와 멋

바다 건너 섬에는 신선의 정원이 있다네. 부용동



 

바다 건너 섬에는 신선의 정원이 있다네. 보길도 부용동 세연정


부용동은 중국의 부용성이며

옛날 꿈꾸던 그곳 전경 얻었네

세인들은 신선이 산다는 선도를 알지 못하고

다만 기화와 요초만을 찾고 있네


<고산유고>에 나오는 시구이다. 고산 윤선도가 중국 부용성의 선유고사를 염두에 두고 부용동이라는 이름을 택한 것으로 이해된다. <보길도지>에는 고산이 이곳을 부용동이라 한 연유에 대해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하여 부용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판석보. 연못의 수위를 조절하는 물막이로 평소에는 다리가 되고 물이 넘치면 폭포가 된다.

상록수가 우거지고 경관이 빼어난 자연경관을 가진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유적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섬의 지형이 피어나는 연꽃을 닮아 부용동이라 불렀는데 고산은 섬 곳곳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자신만의 낙원, 부용동 정원을 가꾸었다.

 회수담과 세연정

국문학사상 빛나는 작품인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이 이 섬을 찾게 된 데에는 연유가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자 고산은 왕을 돕기 위해 식솔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했다.

도중에 왕이 항복하였다는 사실을 안 고산은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하고 제주도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남으로 내려가던 고산은 어느 지점에서 아름다운 섬을 보았고 그곳에 바로 터를 잡았다. 그 섬이 바로 보길도다.

 서대. 동대와 더불어 무희가 춤을 추고 악사가 풍악을 울리던 무대였다.

현재 부용동 정원은 크게 살림집인 낙서재와 산 중턱의 휴식공간인 동천석실, 풍류의 공간인 세연정으로 나눌 수 있다. 보길도 전체를 자신만의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고산은 섬 전체를 조경하기 시작하였다.

세연정 위는 출입금지. 쓴소리 한마디 해야겠다. 정자 위는 모름지기 올라가야 제맛이고 한옥은 사람의 온기가 있어야 오래간다. 편의적인 문화재 관리는 무조건 출입금지다. 물론 신발을 신고 올라가거나 정자 위에서 음식을 먹는 관광객들도 문제지만 그런 이유로 출입을 금지한다는 건 문화재 관리의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다. 여행자는 출입금지를 무시하고 올라갔다.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고 맨발로 올라섰다. 한심한 노릇이다.

 세연지에 나들이 나온 오리 가족

그중 세연정이 가장 공들여 가꾼 곳이다. 흘러내리는 물을 판석보로 막아 연못인 세연지(계담)를 만들고 다시 그 물을 인공 연못인 회수담으로 끌어들였다. 두 연못 사이의 인공 섬에 세연정을 세워 주변 경관을 누리게 하였다.

 세연정과 뾰족한 사투암, 세연지

두 연못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인 칠암이 있어 단조로울 수 있는 풍경을 역동적으로 바꾸어낸다. 거북 모양의 암석은 다리가 되어 엎드려 있고, 세연지 남쪽 산 중턱에 있는 옥소대를 향해 활을 쏘았다는 사투암은 묵직한 몸에 비해 날렵하다.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흑약암은 뛸 듯 하면서도 뛰지 않는 진중함이 있다.

 칠암 중의 하나인 흑약암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악공들을 거느리고 세연정에 나가 벗하며 놀았다. 연못에 배를 뛰워 아름다운 미희들을 줄지어 앉혀 놓고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노래하게 하면서 찬란한 빛깔의 옷과 어여쁜 얼굴이 물위에 비치는 것을 감상했다. 때로는 정자 위로 악공을 불러 올려 풍악을 울리게 했다.” <가장유사>에 적힌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 생활이다.

85세로 보길도 낙서재에서 삶을 마칠 때까지 고산은 모두 25채의 건물을 지어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행적도 이곳에서는 잠시 멈추었을 것이다. 

세연정은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 원림의 백미다

우리나라 원림의 백미인 보길도 세연정은 담양의 소쇄원, 영양의 서석지와 더불어 조선 3대 민간정원으로 손꼽힌다.




김천령의 여행이야기에 공감하시면 구독+해 주세요

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김천령의 풍경이 있는 한국기행]에 링크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