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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첩첩 산주름 속 고요한 산사, 각연사


 

첩첩 산 주름 속 고요한 산사, 각연사
괴산여행⑥ - 연못 속의 석불이 세운 사찰, 각연사

 

언제쯤 나올까. 각연사 가는 길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마을이 끝나고 논밭이 듬성듬성 보이는가 싶더니 길은 이내 산속으로 접어든다. 차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산길은 산자락을 접어들더니 계곡을 끼고 들어간다. 차의 엔진 소리가 깊은 산중의 적막을 깨뜨릴까 두려워 걷는 속도에 차의 속도를 맞추어 최대한 느리게 운전하였다.

 

다람쥐 한 마리가 길을 막은 채 영역을 침범한 수상한 여행자를 쏘아본다. 차를 세웠다. 다람쥐도 곁눈질을 하며 쏜살같이 숲으로 사라졌다. 고요했던 숲이 요란해지기 시작하였다. 한 차례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산새들의 합창이 시작된다.

                           대웅전 층계에는 옛 건물의 기단 등으로 쓰였을 석재들이 계단 곳곳에 끼어 있다.

길을 깊숙이 들어갔는데도 아직 산사의 행방이 묘연하다. ‘걸을까.’ 하는 마음이 내심 생겼으나 차 세울 공간도 마땅하지 않고 전날 이미 20여 km를 걸어서 다리는 쉬고 싶어 했다. 일단은 차로 천천히 이동하기로 하였다.

 

얼마나 들어왔을까. 눈앞에 일주문이 나타났다. 일주문 앞의 제법 너른 공터에 차를 세우고 산사로 향했다. 모퉁이를 도니 이내 절이 나타났다. 절 앞을 계곡이 휘두르고 있는 정남향한 사찰은 누가 보아도 햇빛 넘치는 아늑한 자리에 있었다.

 승려상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2년인 515년에 유일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각연사 앞산인 칠보산 너머의 사동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공사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나무를 다듬고 남은 대팻밥이 늘 없어졌다.

이를 수상히 여긴 유일 스님이 밤에 몰래 지켜보니 까치가 대팻밥을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스님이 뒤를 따라 가보니 까치들이 산 너머 못에 대팻밥을 떨어뜨려 못을 메우고 있었다. 그 못에서 이상한 빛이 나서 들여다보니 석불 한 기가 들어 있었다.

이에 스님은 절을 못 있는 데로 옮겨 세우고 석불을 모신 후 ‘깨달음이 연못의 부처님에서 비롯되었다覺有佛於淵’고 하여 각연사로 절 이름을 지었다. 지금 비로전에 모신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그것이라고 한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 유서 깊은 절은 고려 초기 통일대사가 중창을 하여 대찰이 되었고 그 후에도 몇 번 중수를 했다고 하나 지금은 대웅전과 비로전, 삼성각 등 몇 채의 전각만 있을 뿐이다.

 

대웅전 층계를 오르다보면 옛 건물의 기단 등으로 쓰였을 석재들이 계단 곳곳에 끼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절의 입구에는 이곳에서 나온 맷돌, 석등, 부도의 지붕돌, 주춧돌 등이 쌓여 있어 각연사가 한때 번창했던 절임을 알 수 있다.

 

각연사에서 주목할 만한 문화재는 각기 보물 제1295호와 제1370호인 통일대사 탑비와 부도다. 부도비는 사찰과 1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고 부도는 이곳에서 다시 30여 분을 더 올라가야 한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다음으로 보물 제433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대웅전 옆의 비로전에 있는 석조불상은 각연사의 창건 설화와도 연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통일신라 말의 빼어난 불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또 하나 눈여겨 볼만한 것은 대웅전 안의 승려상이다. 이 승려상은 각연사를 창건한 유일 스님이라고도 하고 중국의 달마상이라고 한다. 법당 안 동쪽에 있는 이 승려상은 높이가 1.3m로 흙으로 빚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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