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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길

자줏빛 자운영, 평사리 들판을 걷다-느림의 여유


 

자줏빛 자운영, 평사리 들판을 걷다-느림의 여유

 

여행자는 늘 행복합니다.

아버지 지리산과 어머니 섬진강을

가까이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섬진강을 찾았습니다.

한동안 상춘객들로 몸살을 앓았을

섬진강을 어루만지고 싶었습니다.

매년 봄이면 치러야 하는 강의 운명이지요.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섬진강은 한적했습니다.

 

강의 동쪽에 있어 하동이라 불리는 고을에 악양이 있습니다.

중국의 도읍이었던 낙양을 본떠 옛사람들은 이곳을 악양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동정호 일대는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고 있었습니다.

당나라 소정방이 평사리의 호수가 중국의 동정호와 비슷하다 하여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악양은 하동에서 가장 넓은 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작년 2월 녹차 재배지 중 세계 최초로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지요.

느림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행복을 가지고 있는 고장입니다.

 

평사리가 알려진 것은 아시다시피 소설 <토지>였습니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대지주 최씨 가문의 4대에 걸친 비극적 사건을 다룬 소설 <토지>는
허구를 실재로 만든 문학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입니다.

 

오늘은 악양 평사리 들판을 걷기로 하였습니다.

여느 농촌과는 달리 들판에는 비닐하우스가 없습니다.

오직 자연이 주는 햇빛과 신선한 바람, 맑은 강물이 있을 뿐입니다.

 

이곳에도 최근 ‘토지길’이라는 길이 생겼습니다.

이것도 유행이겠지요. 너도 나도 길을 만듭니다.

다행히 걷는 길이어서 반가움이 앞서면서도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쪽이 쓰려옵니다.

길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때가 온 것도 같습니다.


흔히 자동차가 자연을 망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걷는 길을 만듭니다.

그러나 자연을 망치는 궁극은 사람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은 자기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입습니다.


산은 등산객이 훼손하고

여행지는 여행자들이 어지럽히고

야생화는 사진가들로 죽어갑니다.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잊고 삽니다.

 

토지길은 두 가지 갈래가 있습니다.

1코스는 평사리공원에서 출발하여

악양들판, 동정호, 고소성, 최참판댁, 조씨고택,

취간림, 악양루를 거쳐 화개장터까지 이르는 18km로 다섯 시간이 소요됩니다.
2코스는 화개장터에서 시작하여

십리벚꽃길, 쌍계사, 불일폭포, 국사암까지 13km 정도의 길로 세 시간이 걸립니다.

 

여행자는 정해진 길에 얽매이지 않고 악양들판을 걷기로 하였습니다.

길은 애초부터 정함이 없었습니다.

그저 한 사람이 다니고 두 사람이 다니고 그 길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 길이 될 뿐입니다.


아내는 차를 타고 움직였습니다.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달립니다.

여행자는 타박타박 그냥 걸었습니다.

무엇이 옳다 굳이 주장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가면 그만입니다.

 

멀리 부부송이 보입니다.

소설이 현실이 된 평사리에서 이 부부송도 이름을 얻었습니다.

각기 서희와 길상이 나무가 되었습니다.

 

농부들이 일군 들판에는 자운영이 피어 있었습니다.

예전만큼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기대하였지만

부지런한 농부가 이미 논에 물을 대고 난 후여서

자운영은 언덕배기에만 듬성듬성 피어 있었습니다.


오히려 좋았습니다.

온 들판이 자운영으로 뒤덮여 있었다면

여행자는 무릎을 굻고 고개를 숙이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작은 꽃이 주는 감동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느릿느릿 걸었습니다.

봄날인데도 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였습니다.

인과응보이겠지요.

 

두어 시간을 들판에서 보냈습니다.

지그재그 논둑길을 걸어보고

솔숲에서 새소리에 취해도 보았습니다.

호수 주변의 연둣빛 버드나무를 따라 빙글빙글 돌기도 하였습니다.

 

여행자에게 애초 완주는 의미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보라고요.

코스가 있으면 완주를 해야 하고

그래야 어느 걷기 코스를 다녀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여행자는 게으릅니다.

그냥 하염없이 봄빛에 젖어들 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어리석은 여행자에게 있어 여행은 시작도 끝도 없는 여정일 뿐입니다.


두어 시간을 넘게 걸었는데도

평사리 하평마을에서 이백 보도 채 떨어지지 않은 외둔마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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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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