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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기행

도심 속 골목길의 추억, 동광동인쇄골목(부산)



 

도심 속 골목길의 추억, 동광동인쇄골목(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40계단'으로 향했다. 변덕스런 봄 날씨에도 불구하고 걷는 내내 햇살은 따사로웠다. 하늘 높이 솟은 전망대가 보이는 용두산 공원과 부산근대역사관을 오른편에 끼고 길을 걸었다.








 

책장골목과 연달아 있는 길이여서 중간 중간 서점도 보인다. 주로 종교서적을 팔고 있는 전문서점들이었다. 인도에는 갖은 물건들을 내어놓고 봄손님들을 유혹한다. 가격이 너무 착하다는 느낌에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갈 것만 같다. 그러던 중 여행자의 눈에 기이한 문구가 들어왔다.

 

‘땅바닥 만원’ 이런 횡재가 있나. “여보, 땅바닥이 만원이래. 우리 살까?” 땅을 살 마음은 전혀 없는 여행자가 농담을 건네었다. “어이구, 땅바닥이 아니고 그 앞 땅바닥에 있는 구두가 만원이라는 거지.” 그제야 바닥에 깔려 있는 구두들이 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구두가 바닥에 깔려 있는 데도 왜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제 딴에는 진지한데 가끔 주위를 세밀히 보지 못하고 툭 내뱉는 말이 주위사람들을 어이없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10여 분 남짓 걸었을까. ‘동광동인쇄골목’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부터 한때 전국 최대의 규모를 자랑했다던 인쇄골목이다. 초입에서는 도심의 여느 골목길과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면 이곳이 인쇄골목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무슨 제본, 인쇄. 명함, 오시, 박전문 등 인쇄소를 알리는 현판과 인쇄 용어들이 적힌 문짝들이 골목을 빼곡하게 채운다.


 

“여보, 오시가 뭐야?” 간판을 보던 아내가 뜬금없이 물었다. “어, 쉽게 이야기하면 책홈이라 생각하면 돼. 책 표지 앞뒤의 묶음 쪽 끝부분에 각각 길게 홈을 내어 책 넘김이 쉽도록 하는 거지.” 나름 출판 일을 하고 있어 이 분야는 조금 알고 있다. “왜 인쇄에는 일본식 용어가 많지.” “그건 당연하지. 우리나라 근대 인쇄업(활판인쇄)이 일제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일본이 활판인쇄에서는 앞서갔다 보니...”



 


인쇄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려는 노력은 많이 있지만 아직도 인쇄소에서는 일본식 용어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인쇄골목에서 먼저 이런 노력들을 한다면 분명 전국적으로 인쇄용어가 우리말로 정착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실 인쇄기술은 우리가 가장 시초가 아닌가.







 

동광동인쇄골목은 안성기, 박중훈이 출연했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유명한 40계단을 중심으로 300여m에 걸쳐 있다. 인쇄ㆍ출판ㆍ기획ㆍ재단ㆍ지업사 등 인쇄관련업종 200여개소가 한곳에 모여 부산 전체의 경인쇄 물량 50%를 처리하고 있다고 한다. 전국최대의 인쇄 골목이라고 한다.

 


이곳 중앙동, 동광동 일대의 인쇄골목은 1960년대 초 처음으로 문을 연 신우정판과 동양정판이 효시가 되어 하나둘씩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초부터 국제시장 대청동 입구와 옛 시청 주변에 있던 업소들이 전세가 싼 이곳으로 대거 이전해오면서 이 일대가 인쇄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골목길은 의외로 한산하였다. 인쇄소 특유의 냄새가 코를 자극하지만 책의 향기처럼 편안함을 준다. 지식을 생산하는 기계소리와 종이를 옮기는 오토바이 소리가 고요한 골목길을 이따금 깨울 뿐이다.

 

“어, 이곳에는 멋진 할아버지들이 많네.”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은 아내가 한마디 꺼낸다. “지금이야 인쇄업이 시들하지만 한때는 인쇄업을 하던 분들이 지식인계층에 속해서니까.”



 

과거 인쇄업은 그 지역의 지식 문화를 생산하는 기지 같은 역할을 했다. 과거 서울의 충무로뿐만 아니라 지역에서도 인쇄소는 지역 지식문화의 중심이었다. 한때 대구가 서울보다 인쇄업이 발달했던 이유도 대구가 지식을 생산하고 향유하는 층이 서울만큼 두터웠다는 증거이다. 지역 인재가 서울로 집중되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골목길 중간쯤에 아주 오래된 인쇄소 건물이 보인다. 아마도 이 건물은 이곳에서 인쇄업이 가장 활발했던 60, 70년대의 건물이었을 것이다. 오래된 희미한 지식에 대한 향수가 깊게 배여 있다. 

 


골목길을 느릿느릿 걷다보니 목이 마르다. 40계단 옆에 있는 허름한 과일주스 가게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며 목을 축였다. 동광동인쇄골목, 딱히 눈에 띄는 구경거리는 없었지만 문화라는 그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골목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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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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