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암자로 가는 길

우리나라 차茶의 성지. ‘일지암’




 

 

우리나라 차의 성지. ‘일지암’

 

 

 대둔사 표충사 뒤편으로 산길이 있다. 두륜산 등산로이다.이 길을 따라 1.3km정도 30여 분을 걸어가면 일지암에 이른다. 일지암 가는 길은 넓은 산길이지만 암자에 다다라서는 가파른 길이다.


 

 땀이 비 오듯 하여 연신 땀을 훔치며 걷고 있었다. 차 한 대가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오더니 내 앞에서 섰다. 스님 두 분이 타고 있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묻길래 일지암에 간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산길을 내려간다.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스님들이 일지암 스님이라는 건 일지암에 도착하여 인기척 하나 없다는 걸 알고 난 후였다.


 

 땀이 온 몸을 적시고 나서야 일지암에 도착하였다. 짙은 숲속에 돌로 쌓은 대문이 보인다. 일지암으로 가는 짧지만 호젓한 산길이다. 다원 앞 둔덕에는 차나무가 푸르다. 법당을 둘러 일지암과 자우홍련사로 갔다.


 

 일지암은 차를 중흥시킨 초의선사가 큰 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중년 이후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머물던 곳이다.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일지암一枝庵’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은 중국 당나라의 시승 한산의 시 “뱁새는 언제나 한 마음이기 때문에 나무 끝 한 가지一枝에 살아도 편안하다.”에서 따온 말이다.


 

 한 마리의 새가 쉬는 데는 나무 한 가지면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얼마나 많이 소유해도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들이 경계해야 할 말이다. 나무 한 가지면 충분한데 욕심을 내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초의선사 당시의 집은 세월의 풍파로 무너져 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하였다. 초막을 짓고 앞쪽 언덕에는 차나무를 심었다. 암자 뒤 바위틈에서는 샘물이 솟아 돌확을 거쳐 연못으로 흘러간다.


 

 샘 근처에는 찻잎을 다루는 맷돌이 있다. 대나무로 엮은 일지암 마루 끝에는 찻물 끓이던 부뚜막이 있다. 암자의 석축에는 다감茶龕이라고 새겨진 면석이 끼어 있다. 그 앞에는 넓적한 돌이 있는데 초의선사가 앉아 다선삼매에 들던 돌평상으로 여겨진다.


 

 연못에 네 개의 돌기둥을 쌓아 만든 누마루 건물이 있다. 한 눈에 봐도 시원한 이 건물은 자우산방(자우홍련사)이다. 자우산방은 초의선사가 삶을 꾸렸던 살림채이다. 누마루 위에는 다기와 차가 놓여 있었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당대의 대학자들과 교류를 하였다. 끊어져 가던 우리의 차문화를 다시 일으켜 차와 선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을 확립하여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등의 명저를 남겼다.



 

 그가 남긴 동다송은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다. 차의 효능,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차(東茶)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다.


 

 차는 삼국시대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불가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차례’, ‘다반사’ 등의 말들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에만 하여도 차문화는 융성하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불교가 배척당하면서 다도도 쇠퇴하여 그 명맥만 겨우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초의선사가 다선일미사상을 확립하고 그에 기반하여 다도의 이론을 정립하고 차문화를 널리 펴 중흥시켰다.


 

 이곳은 특히 남종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진도 운림산방의 주인인 소치 허련이 초의선사와 추사를 두 스승으로 삼아 미산, 의재, 남농으로 이어지는 남종화의 화풍을 완성하였다.


 

 우리나라 차문화의 성지라고 불리는 일지암은 초막 한 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작은 초막이 주는 의미는 무한하다. 차나무는 푸르고 자귀나무는 붉었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http://blog.daum.net/jong5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