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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또 하나의 일상

핏자국 선명한 피바위와 일제만행의 흔적 황산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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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당겨' 밤늦게 까지 싸우다.
황산에서 대승을 거둔 이성계가 도주하는 왜구를 섬멸하고자 하였으나 날이 저물자 달을 당겨 싸웠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 바로 '인월引月'이다. 왜구를 끝내 물리치겠다는 이성계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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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위 남천변에 있다. 황산대첩 당시 섬멸당한 왜구들이 흘린 피가 바위를 붉게 물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도 바위는 붉은색을 띄고 있으며 바위 홈에 담긴 물도 피처럼 붉다. 돌의 성분을 따지는 날카로움보다 수난과 자부심의 우리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

고려 말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어수선하였다. 남방 지리산에 왜구가 들끓게 되자 우왕 6년인 1380년에 나라에서는 가는 곳마다 전승을 했던 이성계를 왜구 토벌에 나서게 하였다. 이 때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기 8년 전이었다. 이성계는 지금의 운봉면 화수리 황산일대에서 왜구를 섬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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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발도가 이끄는 3천여 명의 왜구를 10배나 적은 군사로 물리쳤으니 이후 이성계의 입지는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승리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왜구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선조 10년인 1577년에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태조 이성계의 황산이 잊혀짐을 염려하여 비석을 세울 것을 청하여 황산대첩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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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각 이성계가 승리를 기념하여 바위면에 자기의 이름과 장수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이 황산대첩은 최영장군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여말 왜구와 싸워 승리한 2대 대첩으로 기록된다. 황산대첩비는 일제말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패망을 앞둔 조선총독부는 반시국적인 고적들을 철거 또는 파괴해도 좋다는 비밀문서를 각 도 경찰부장들에게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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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각의 글씨는 일제가 정으로 쪼아 읽지 못하게 하였다.

일제는 권율장군의 행주전승비, 사명대사비, 명량대첩비, 김시민전승비 등 주로 일제가 감추고 싶었던 패전기록을 파괴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 황산대첩비는 학술적 사료로 보존해야 하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바 서울로 수송하기는 곤란하니 그 처분을 관할 경찰당국에 일임한다"고 하였다. 이에 황산대첩비는 폭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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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각의 비신 일제의 파괴로 비신이 동강았을 뿐만 아니라 글자마저 읽을 수 없다.

현재 파손된 비신은 파비각 안에 있다. 일제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비신에 새겨진 글자마저 읽지 못하도록 긁어놓았다. 또한 이성계가 황산대첩의 승전을 기리고자 바위면에 자기 이름과 장수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일제는 정으로 그것을 쪼아 읽지 못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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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북쪽을 아무말없이 흐르는 남천에는 오늘도 왜구의 피가 흐르듯 붉게 물든 피바위가 있다.

대마도 왜구의 역사 보러 가기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98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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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 블로그(
http://blog.daum.net/jong5629)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