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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애불

동학군의 비결 서린 남한 최대의 칠송대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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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에 가면 낙조대까지는 꼭 가보아야 할 일이다.
선운사의 번잡함을 잠시 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도솔천을 따라 난 이 길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부담없이 자연을 만끽하며 오를 수 있는 길이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면 도솔암까지만이라도 꼭 가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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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여 계곡물소리와 봄꽃에 파묻혀 걷노라면 도솔암에 이른다.
도솔암에서 옆으로 난 산길을 조금만 걸어 가면 상도솔암이라 불리우는 내원궁이 있다.
내원궁은 칠송대七松臺라 불리는 바위벼랑 위에 있는데,
여기서 바라보는 낙조대는 가히 말로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선경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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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솔암이 앉은 40여 미터가 넘는 바위벼랑의 칠송대 암벽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불상의 머리부분은 암벽을 파서 도드라지게 하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선각으로 처리헸다.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불은 고려 호족들의 호방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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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집의 흔적 이전에는 불상 위에 누각 모양의 지붕인 닫집이 있었다. 네모난 구멍들과 바위에 박혀 있는 목재, 쇠못의 흔적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닫집은 인조 20년인 1648년에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마애불의 전체 높이가 17여 미터에 달한다고 하니 이것을 조성할 당시 얼마나 많은 공력을 쏟아부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40여 미터의 바위벼랑에 17여 미터의 불상을 새긴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마애불을 조성하고자 하는 불심과 그것을 실행할 재력이 뒷받침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 된다. 배꼽 주위, 엄밀히 말하면 명치께에 감실자국이 있다. 일반적으로 불상과 불경, 시주자의 이름 등을 적어 넣고 돌뚜껑을 봉하는 게 감실인데, 여기 마애불 감실에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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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애불 배꼽 감실에는 비결이 들어 있는데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 감실에 손을 대는 사람도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1820년 전라도 관찰사로 와 있던 이서구가 마애불의 감실을 열어 보았다. 감실 안에는 책이 한 권 있었는데 열어 보니 '이서구가 열어본다'라는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나머지 대목은 갑자기 친 벼락에 읽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후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 1년 전에 손화중의 동학군들이 그 비결을 열어 보고자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벼락살을 걱정하였으나 오하영이라는 도인이 말하기를 이미 이서구가 열어 보았을 때 벼락이 쳤으니 앞으로 연다고 한들 벼락살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나무와 새끼줄을 엮어 부계(공중 계단)를 만들어 감실의 비결을 꺼내 갔다고 한다. 손화중은 비결을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지영 등 세 명의 주모자는 잡혀 역적죄로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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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송기영의 소설"녹두장군"에 나오는데, 이는 오지영이 쓴 "동학사"를 인용한 것이다.
배꼽에서 정말 비결이 나왔는가의 진실 여부를 떠나 이것은 당시 민중들의 바람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여실히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 미륵 세상에 대한 열망들이 이와 같은 비결이야기가 생긴 연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마애불은 북한의 대표적인 국보급 문화재인 '묘길상'과 규모면에서 흡사하며 현재 보물 제 1,20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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