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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절벽에 남은 전설의 마애불, 개령암지를 찾아

 

 

 

 

 

 

절벽에 남은 전설의 마애불, 개령암지를 찾아...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27> 마한의 전설, 개령암지

 

                            ▲  정령치 고개에서 본 반야봉(오른쪽)과 지리산 주능선 1백 리 ⓒ 김종길


달을 잡아당긴 곳 인월에서 달의 궁전 달궁으로 간다. 달궁 마을은 도로가 뚫리기 전만 해도 첩첩산중의 긴 협곡에 있었다. 진한과 변한에 쫓긴 마한의 한 왕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서북능선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아득하다. 황 장군과 정 장군이 쌓은 수비성은 산속에 여전히 굳건한데 아득한 옛날 왕궁 터는 시멘트로 발라져 주차장이 되어 버렸다. 철이면 엄청난 피서 인파와 가을 단풍객들이 들이닥치는 곳, 이곳에서 옛 왕궁의 전설을 기억하는 건 어쩌면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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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골이 오싹한 정령치 ⓒ 김종길 

 

지리산 서북능선 정령치

"산은 혼돈의 뼈요, 바다는 혼돈의 피다. 동해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 하여 지리산이다.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이 반야봉이다. 그 봉우리 좌우에는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는 두 고개가 있다.

옛날 한나라 소제(BC 87~74년) 즉위 3년,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리를 피해 이곳에 도성을 쌓았다. 황, 정의 두 장수를 시켜 공사를 감독했으므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고개 이름을 짓고, 72년 동안 도성을 보호했다. 그 뒤 신라 진지왕 원년에 운집대사가 중국에서 나와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서 황령암이라 했다."

서산 대사의 <황령암기>에 나오는 글이다. 지리산에서 출가하고 깨달음을 얻은 서산 대사는 1546년 가을 지리산을 떠나 오대산과 금강산을 한동안 떠돌아다니다 1558년 처음 발심했던 지리산을 다시 찾게 된다. 내은적암에서 3년을 지내다, 이내 황령을 지나 능인암, 칠불암 등 여러 암자에서 다시 3년을 지냈다고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리는 글-상완산노부윤서>에 적고 있다. 이 시기에 적은 것으로 보이는 <황령암기>에서 서산 대사는 '마한도성설'에 따라 지리산 개산의 역사를 적으며 '정령(鄭嶺)'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72년 동안 존재했던 옛 마한도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깊숙한 곳을 어이하여 도성으로 삼았던 걸까. 생각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방으로 튀어 나간다. 그러나 기록은 거기에서 끊기고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야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자 남원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의병장이었던 조경남(1570~1641)은 <난중잡록>에서 "밤에 황류천(달궁 계곡)을 건너고... 밤새도록 가서 겨우 정령성(鄭嶺城)에 도달하여 잠깐 쉬었다"고 적어 당시에도 정령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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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령암지 가는 길 ⓒ 김종길


정령치(해발 1172m) 고갯마루에 섰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급경사지만 이내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푸근하게, 아주 가까이 다가오는 반야봉에 모든 것이 평온해진다. 반야봉 옆으론 삼도봉이 지척이고 토끼봉을 지나 천왕봉까지 지리산의 등뼈, 주능선이 저 멀리 100리 밖까지 펼쳐진다. 정령치에서의 지리능선 조망은 장엄하기 그지없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풍경이다.

그뿐만 아니다. 노고단 아래 종석대에서 성삼재를 지나 작은고리봉, 묘봉치, 만복대, 정령치, 큰고리봉, 세동치, 부운치, 팔랑치, 바래봉, 덕두산까지 이어지는 해발고도 1000~1400미터에 이르는 봉우리와 고개 들이 출렁이는 긴 서북능선이 이곳을 관통한다. 서북능선은 주능선 다음으로 두 번째로 긴 능선이지만 성삼재와 정령치 종단도로로 두 동강났다. 예전에는 1백 리에 달하는 주능선과는 달리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으나 정령치 종단도로가 생겨진 이후부터 풍경이 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종단도로로 산은 끊겼지만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정령치 일대의 능선은 초원지대이다. 그 이유는 1960년대에 임수명, 임인택 부자가 이곳 지리산 서북능선에 사탕무를 재배하려고 정령치의 수비성 터와 그 일대 10만여 평을 개간하면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업은 꿈에 그치고 말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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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령암지 가는 길 ⓒ 김종길


절벽에 남은 전설의 마애불

싱그러운 풀밭이 펼쳐진다.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부드러움만 남은 곳, 어머니 품처럼 따사롭고 편안하다. 능선길이라고 해서 칼바람이 불고 뾰족한 바위가 있을 거란 걱정일랑 적어도 이곳에선 접어둬도 좋다. 좁은 숲길이 이끄는 곳으로 그저 발길만 옮기면 이미 그곳은 평안의 땅이다. 만 가지 복이 사방으로 내린 만복대도 지척이니 굳이 말해 무얼 할까. 온통 풀들의 천국. 온갖 약초와 산나물이 있는 이곳은 야생의 작물이 자라기에 최적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하늘을 향하던 길이 숲 속으로 이어진다. 붉은 듯 하얗게 핀 산철쭉이 길안내를 자청하고 솔숲에 가만히 들어앉은 오랜 무덤에 비치는 햇빛이 따사롭다. 그 아래로 늪이 있다. 평평한 고원의 산정 늪은 이곳이 모든 생물의 낙원임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늪을 돌아 옛 암자 터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기와조각이 더러 보이고 숲 덤불에 돌담과 주초로 쓰였을 돌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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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령치 늪 ⓒ 김종길


길이 끝났다. 하늘로 솟은 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은산철벽, 이곳은 부처의 세계. 암벽에는 모두 열두 분의 부처가 새겨져 있다. 아니,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에 깃든 부처를 드러낸 것이리라.

어찌하여 이 깊숙한 곳에 부처를 새겼을까. 아니, 어찌하여 부처가 이 깊숙한 산중 암벽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가만히 암벽에 다가섰다. 서 있는 불상이 둘인데, 그중 하나는 하반신이 없다. 앉아 있는 불상은 열쯤 되어 보이나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몇 안 된다. 어떤 것은 아예 불상이라고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마모됐다. 몇 번이고 들여다봤지만 열두 부처가 모두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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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 열두 구의 불상이 있으나 모두 찾기는 어려웠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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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한의 장군상으로도 알려져 있는 마애불상 ⓒ 김종길 


4m에 달하는 가장 큰 불상은 듬직하다. 새긴 솜씨도 남달라 간략히 처리된 옷 주름에 비해 돋을새김의 두드러진 얼굴에 유달리 큼직한 코, 듬직한 체구의 다부진 불상은 차라리 그 옛날 용맹했던 장군을 떠올릴 정도로 건장해 보인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이 불상을 마한의 옛 장수라 했다. 실제로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통한으로 기억되는 마한의 왕조에 대한 기억과 열망이 장군상이라는 믿음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나무가 숲을 이뤄 사방을 둘러싼다. 적막한 곳, 세월에 헐어진 불상의 무상함이 사무친다. 나무 사이로 멀리 외호하고 있는 지리능선 1백 리를 가뭇가뭇 훔쳐보다 문득 이 절벽 바위의 불상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딘지 궁금해졌다. 울울한 나무가 지리능선을 가리고 있어 정확한 방위를 잡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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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맹한 장수 같은 마애불상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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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애불에서 본 반야봉(오른쪽)과 지리능선 ⓒ 김종길


불상군이 있는 암벽을 돌아 오르기 시작했다. 위태위태한 길도 잠시, 고개를 돌리자 장엄한 지리능선 1백 리가 펼쳐졌다. 가만 숨을 고르고 난 후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이 가 닿은 곳은 놀랍게도 천왕봉이었다. 순간 온몸이 뭔지 모를 전율 같은 것에 휩싸였다. 그건 분명, 어떤 희열이었다.

왜 그렇게 적막할 수밖에 없는지, 천 년의 긴 시간이 왜 이곳에선 순간으로 다가왔는지,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영원으로 이어지는지를 알 듯싶다. 적막한 터가 주는 고요함은 외로움도, 적적함도, 허허로움도 아닌, 텅 빈 공간에서의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희열, 충만 같은 것이었다. 마음이 넉넉해지고 공기가 따뜻해지고 햇살이 넘치는 곳, 긴 침묵이 흐르는 예가 바로 극락일 성싶다.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 지리산 암자의 대부분이 장엄하듯 이곳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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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천왕봉(뒤쪽 가운데) ⓒ 김종길

  
돌아오는 길에 문득 황령암은 어디일까, 궁금해졌다. 황령암은 서산 대사가 <황령암기>에서 '신라 진지왕 원년에 운부대사가 지리산 황령 남쪽에 세운 절로, 꽃과 대나무가 서로 비추어 그 그림자가 금지(金池)에 떨어지면 안양(극락)세계를 방불케 했다.'고 한 아름다운 절이었다. 황령암은 1538년경 소실되어 1544년 봄에 다시 지어졌다는 아득한 이야기만 전해질 뿐이다.

달궁과 서북능선 고개들
달궁이란 이름은 마한의 '달의 궁전(月宮)'의 전설에서 왔다고 대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예전 이곳에 있던 달공사(達空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왕궁 터로 추측되는 곳에서 발견된 주춧돌 또한 궁궐의 것이 아니라 폐사지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왕궁 터에 나중에 절이 들어섰을 수도 있다. 마한의 미스터리를 영원히 남겨두는 것이 섣불리 밝히려 드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지리산에서 주능선 다음으로 두 번째로 긴 능선인 서북능선에는 여러 고개가 있다. 정령치가 그 옛날 마한의 장수 정 장군이 지키던 곳이라면 황 장군이 지키던 곳은 황령재, 각기 세 명의 성이 다른 사람이 지키던 곳은 성삼재, 그리고 여덟 명의 병사들이 지키던 곳이 팔랑치이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은 정령치 휴게소에서 바래봉 방면의 큰고리봉으로 20분쯤 가다 보면  있다. 보물 제 1123호이다.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인근 마을 사람들 사이에선 마한의 장군상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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