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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지리 10대의 전설, 우번대

 

 

 

 

지리산 오지암자의 수행자를 찾아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24〕지리 10대의 전설, 우번대

 

 

 종석대에서 본 만복대 일대
ⓒ 김종길  

 

 

지난가을이었다. 지리산 반야봉 아래 깊숙이 숨은 1500고지 묘향대를 각고 끝에 찾아갔을 때 호림 스님에게서 우번대라는 곳을 처음 듣게 되었다. 지리산 10대 중의 하나인데, 상무주암 현기 스님처럼 40년 넘게 홀로 수도하고 있는 스님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번대로 가는 길도 자세히 설명해주었으나 당시로선 실제로 가보지 않았으니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해가 바뀌었고 날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따듯한 5월쯤에는 가봐야겠다는 계획을 나름 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월간 <마운틴> 강성구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예전부터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이번 암자 가는 길에 동행취재를 하고 싶다는 청이었다.

사실 지리산 암자를 다녔던 작년 5월부터 함께 가기를 원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으나 오지 암자의 경우 하룻밤을 산장에서 자고 하루 종일 산을 타야 하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라 거절했다. 게다가 나 또한 초행길이라 안전을 약속할 수 없었다. 강 기자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으나 그가 산악전문기자라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두말없이 흔쾌히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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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석대
ⓒ 김종길

 


지리산의 서쪽 끝, 종석대

인월 버스정류장에서 강 기자를 만나 성삼재로 향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가는 길, 코재에서 구름을 쫓아 우번대로 향했다. 너른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그 끝에 거대한 암반 덩어리가 하늘로 우뚝 솟아 있다. 종석대(1356m)이다. 종석대는 문자 그대로 거대한 바위 종을 엎어 놓은 형상이다. 노고단 못지않은 경관을 자랑하며 그 기세가 당당하다.

이곳에 오르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번대 법종 스님의 말로는 예전 지리산 빨치산들이 이곳 종석대에 올라 사방을 파수했다고 한다. 구례들판과 섬진강, 노고단 방면, 주능선 쪽, 만복대 등의 북쪽 능선 등 동서남북 보이지 않는 곳이 없으니 지리산 서쪽 방면에서 토벌대의 이동을 파악하기에는 이곳만 한 곳도 없었을 것이다. 흔히 지리산 주능선의 서쪽 끝 봉우리를 노고단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종석대가 서쪽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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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빛
ⓒ 김종길

 


오지여서 제대로 된 길이 없을 거란 추측은 기우에 불과했다. 우번대 가는 길은 지리산 속의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오지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 잘 정비된 오솔길엔 봄빛이 넘치고 넘쳤다. 다만 이따금 나타나는 능선 길은 이곳이 예사 땅이 아님을 말해주는 듯 매서운 바람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우번암의 스님

숲 사이로 아주 튼실해 보이는 건물 한 채가 나타났다. 우번암의 별채였다. 돌의자에 앉아 잠시 요기를 한 후 바로 곁의 우번암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번암은 아주 낡았지만 규모는 제법 컸다. 바람이 매서웠다. 겨울에는 더 심한 모양. 외딴 섬마을의 집처럼 지붕이 날아갈세라 사방을 끈으로 연결해서 땅바닥에 박은 쇠말뚝에 단단히 고정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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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번대 별채
ⓒ 김종길

 


암자 옆으론 텃밭이 있고 그 뒤에 작은 바윗돌에 둘러싸인 제단이 보인다. 산신각이다. 산왕(山王)이라고,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작지만 반듯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거창하게 산신각이라는 건물을 짓는 수고로움보다 마음과 믿음을 바위에 새기는 지혜로움이 엿보인다. 크게만, 크게만 지으려고 하는 오늘의 종교 건축이 얼마나 허상을 쫒고 있는 것인지, 이 소박한 산신각이 덧없음을 보여준다.

암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사람의 체취를 느꼈다. 한참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헛기침 소리와 함께 스님이 나왔다. 얼핏 보기에 수행자라기보다는 산지기처럼 보였다. 초라한 행색 때문이 아니라 승복을 입고 있지 않아서다. 아직도 추위가 매서워 아웃도어 의류와 점퍼를 껴입은 채 신발도 두툼한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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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번대
ⓒ 김종길

 


흘깃 우리 쪽을 보고 난 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스님은 샘물가로 향했다. 그러곤 샘물 한편에 놓인 항아리의 뚜껑을 잠시 열어보더니 이내 암자 안으로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다시 암자엔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스님이 다시 나왔다.

"핫셀(독일의 카메라 기종)을 아시오?"
"네? 아 예…."

아이 같다. 무심한 듯 농담처럼 툭툭 내뱉다가도 활짝 웃는다. 그러곤 다시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마치 장난감에 푹 빠진 아이처럼 기뻐 어쩔 줄을 모르며 자신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나 또한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순간 비치는 형형한 그의 눈빛을 보았다. 천진난만한 웃음 속에 감추고 있는 어떤 날카로움, 빛이 번쩍이는 듯했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스님께 물었다.

"스님, 우번대에 머문 옛 스님들이 있으신지요?"
"그걸 왜 물어보오. 글쎄…. 수월 스님, 용하 스님이 머물렀죠. 검찰총장 김진태를 아시죠. 수월 스님에 대해 쓴 모양인데, 수월 스님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지요. 그래서 그 양반이 언젠가 이곳을 들렀지. 그때는 그 사람이 김진태라는 사람인 줄 몰랐다오. 그가 가고 난 뒤에 사람들이 김진태라고 말했지만, 그게 뭐 대수요?"

다시 카메라 이야기로 이어졌다. 마냥 신이 난 아이처럼 모든 말들의 길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사진 이야기에만 집중했다.

"사진, 그것도 한 20년 했더니 내가 못 견디겠더라고요. 필름도 없어지고, 사진도 없어지고, 급기야 카메라까지 없어지니 괴로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카메라고 사진이고 죄다 인연을 싹둑 잘라버렸지 말이요. 사진이라는 게 그 이상하게도 공부(참선)하는 거 하고 비슷하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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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끼질
ⓒ 김종길

 


우번대 토굴 자리

암자에서 만난 스님의 법명은 법종 스님이었다. 지금의 암자는 50년 전쯤 스님의 스승인 백운 스님이 지었다. 범어사와 봉암사에서 수행을 하던 법종 스님은 스승인 백운 스님이 이곳 우번대를 소개해서 들어온 후 지금까지 40년 넘게 이곳에 머물고 있다. 법종 스님이 들어오기 전에는 작은 토굴이 전부였다.

"원래의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 텃밭이요. 저기 텃밭에 토굴이 있었지요. 언제인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풍수를 좀 보는 사람인 듯했소. 하루는 이곳을 지나갔는데 아래 별채를 보고 '우번대, 우번대 하더니만 별 것 아니구먼' 하고 가더라 말이요. 그래서 내가 거기는 별채고 여기가 우번암이요 했더니 '음, 이곳은 좀 낫군' 하지 않겠소. 그래서 다시 '원래의 우번대 자리는 저기 텃밭으로 쓰고 있는 곳이오' 했더니 그제야 그 사람이 무릎을 탁 치며 '그러면 그렇지. 과연 우번대가 헛소문은 아니었군'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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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번암과 옛 토굴이 있던 텃밭
ⓒ 김종길

 


예전 텃밭에는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허름한 토굴 한 채가 있었는데, 그곳이 원래의 우번암 자리였다. 공부는 거기서 해야 제대로 이루어진다며 스님은 아이 같은 얼굴로 히죽거린다. 비가 억수같이 와도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금세 물이 빠져 흙이 보송보송해지는 곳이란다. 기운이 모이는 곳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터로 치면 옛 토굴 터가 제일이요. 그다음이 지금의 암자요, 마지막이 별채란다. 과연 텃밭에 서 보니 바람마저 숨을 죽였다.

"스님, 이곳이 오지라 오는 길이 제대로 없을 줄 알았는데, 길이 너무나 잘 정비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허참, 그건 내가 나무를 자르고 풀을 베서 매번 길을 정리하기 때문이요. 아니면 아주 위험해요. 뱀이 득실거려. 그것도 깊은 산중이다 보니 거의 살모사라. 한번 물리면…. 길을 정리 안 하면 뱀이 있는 줄 모르고 물리기 십상이지. 엊그제도 한 마리가 나왔더구먼."

그러고 보니 우번이라는 이름이 낯설다. 지리산 대부분의 지명이 불교에서 온 말이지만 우번은 아무래도 정확한 뜻이 떠오르지 않는다. 스님께 여쭈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기록들을 뒤적이니 전설 한 토막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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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번대
ⓒ 김종길

 


우번대의 전설

옛날 신라 때 젊은 스님 우번이 조용한 상선암을 찾아 10년 동안의 좌선 수도를 결심하고 혼자서 열심히 불도를 닦기 시작했다. 우번이 정진하던 9년째 되는 어느 봄날이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절세미인이 암자 앞에 홀연히 나타나 요염한 자태로 우번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 아닌가. 그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번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정답게 손짓을 했다. 유혹에 홀린 우번은 젊은 피가 끓어올라 자신이 수도승이란 것도 잊은 채 그 여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 미모의 여인은 보일 듯 말 듯 앞서가며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산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아름다운 수림 속을 나는 듯 가볍게 지나쳐 상봉을 향해 높은 곳으로 올라만 갔다. 우번도 놓칠세라 그 여인을 따라 숲속을 헤치며 정신없이 허겁지겁 따라 올라가다 보니 어느덧 종석대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요염하게 웃으며 손짓하던 그 여인은 갑자기 사라지고 난데없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위엄스레 서 있었다. 우번은 깜짝 놀라 정신을 가다듬었다. 관세음보살이 자기의 도심을 시험하기 위해 미녀로 변신한 것임을 비로소 깨닫고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 자신의 어리석음과 허튼 마음을 뉘우치고 참회했다.

우번이 다시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관세음보살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 큰 바위만 우뚝 서 있었다. 우번은 자신의 수도가 크게 부족함을 깨닫고 이때부터 더욱 분발하여 수도정진하기로 결심했다. 상선암으로 다시 내려가는 대신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수도정진을 계속했다. 우번은 수 년 동안 수도를 한 끝에 마침내 성불하여 신라의 이름난 도승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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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번대
ⓒ 김종길

 


그런데 우번 스님이 도통하는 순간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石鐘) 소리가 홀연히 들려왔다. 바로 이 석종 소리가 울렸다고 하여 이 산봉우리를 '종석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종석대는 다른 이름도 함께 갖고 있는데 우번 조사가 토굴을 파고 수도정진한 곳이라 하여 '우번대(牛翻臺)',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여 서 있던 자리라고 하여 '관음대(觀音臺)'라고도 불린다.

그 후에도 이곳에서 수도하여 도통한 고승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예부터 우번대와 상선암을 불도의 이름난 영지(靈地)로 손꼽았다. 종석대의 종소리는 지금 들리지 않으나 이곳의 일몰은 황홀경이다. 서쪽의 낙조를 보고 있으니 천 년 전 종소리가 능선 굽이를 넘어 은은히 들려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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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석대에서 본 성삼재 도로와 우번대(초록 지붕)
ⓒ 김종길

 


암자에서 나오던 길에 한참을 침묵하던 강 기자가 물었다.

"어떻게 저런 외딴곳에서 40년 넘게 있을 수가 있지요? 그 긴 세월을 저 험한 곳에서 홀로 있을 수가 있는 건지요. 그것만으로도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뭐라고 할까요. 감동적입니다."

 

 

 우번대와 종소리

 

우번대는 성삼재 인근 종석대 아래 1200고지에 있다. 예부터 묘향대, 상무주대, 금대, 서산대, 무착대 등과 같이 지리 10대로 불리며 수도처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러나 전설 같은 이야기만 전해질 뿐 우번대에 대한 이렇다 할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조 남효온이 몇 줄의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1454~1492)이 지리산을 유람한 건 34세 때인 1487년 9월 27일부터 10월 13일까지였다. 그는 <지리산일과>에서 “산봉우리에 만복대(萬福臺)가 있었으며 만복대 동쪽에는 묘봉암(妙峰庵)이, 북쪽에는 보문암(普門庵)이 있는데 일명 황령암(黃嶺庵)이라고도 하였다. 이 반야봉 남쪽에는 고모당(姑母堂)이, 고모당의 남쪽에는 우번대(牛翻臺)가 있는데 우번선사(牛翻禪師)의 도량(道場)이었다.”고 적고 있다.

 

우번대라는 이름은 우번 스님의 전설과 함께 ‘소가 몸을 바꾼 자리’라는 뜻이 있다. 신라 때 문수보살과 함께 길을 가던 길상동자가 어느 밭에서 조 세 알을 먹은 후 그 빚으로 소로 변했다. 소가 된 길상동자는 밭주인에게 세 해 동안 일을 해주고 다시 동자로 화신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번대에는 경허(1849~1912) 스님의 3대 제자를 일컫는 ‘삼월(三月)’ 중 맏상좌인 수월(1855~1928) 스님이 머물렀던 곳이다. 수월은 평생 일하는 수행자로, 글 하나 법문 하나 남기지 않은 그림자 없는 성자였다. 수월은 마흔둘이 되던 1896년에 지리산 천은사와 상선암, 그리고 우번대에서 지냈는데, 여름 결제가 끝난 후 우번대를 찾아가 가을을 홀로 보냈다고 한다.

 

화엄사 주지를 지낸 진응(1873~1941) 스님이 그 강맥을 이은 용하(1892~1980) 스님을 데리고 와서 우번대에서 기도를 했다. 진응 스님은 7일 만에, 시자였던 용하 스님은 15일이 지나서야 신비로운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예부터 우번대에서 기도를 하면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종소리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화엄사의 종소리가 아니라 기도를 하여 깨우침을 얻은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종석대에서 울려 퍼지는 돌종 소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