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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350년 된 천연기념물 벚나무 한 그루, 정말 대단!

 

 

 

 

스님은 왜 벚나무를 심었을까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㉒〕천연기념물 올벚나무, 지리산 화엄사 지장암

 

번다한 화엄사이지만 계곡 하나 건너면 인적이 끊긴다. 황량함마저 드는 산기슭에는 남악사가 외따로 떨어져 있다. 그 옛날 지리산이 오악의 남악으로 떠받들어질 때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다. 국가에서 주도를 했으니 당시 사람들에게 지리산이 가지는 의미는 얼마나 각별했을까.

 

이 깊숙하고 외진 곳에도 봄빛이 들었다. 한창 하얀 꽃을 피운 목련 한 그루가 남악사 지붕을 향해 길게 몸을 드리운다. 그 옆으로 비탈진 시멘트길이 어렴풋이 보인다. 대찰 화엄사에 견주어보면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진한 파랑색의 표지판. 건성으로 쓴 듯한 ‘지장암’ 글씨가 무심하다.

 

 

암자에 숨은 천연기념물

암자 마당 끝에 선 제법 굵직한 나무에 꽃이 막 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 나무가 올벗나무인 줄 알았다. 매화나무였다. 사실 이곳 지장암에 들른 것은 오랜 올벚나무 한 그루 때문이다. 방문객들은 대개 차에서 내려 곧장 화엄사로 들어간다. 제대로 된 안내문조차 없으니 이곳을 살뜰히 살피는 이들은 거의 없다. 단지 암자에 숨은 천연기념물인 올벚나무의 존재를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만 천리 길을 마다않고 지장암을 찾을 뿐이다.

 

 

암자는 큰절 바로 옆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쇠락할 대로 쇠락했다. 언뜻 민가로 보이는 말쑥한 건물이 정면을 향하고 그 옆으로 후줄근하게 낡은 건물이 ㄱ자로 맞대어 있다. 그 뒤 조금 높은 곳에 삼 칸의 법당이 있다. 사실 법당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다면 세 건물 중 법당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야트막한 산줄기가 계곡 쪽으로 흘러내리며 암자를 감싸고 있다. 산줄기는 온통 붉은 동백이다. 그 옆으로 산줄기가 잠시 멈춘 맞춤한 곳에 올벚나무가 서 있다. 무성한 푸른 잎에 듬성듬성 붉음을 감추고 있는 동백에 비해, 올벚나무는 하얀 천으로 온몸을 두른 듯 화려한 자태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올벚나무를 보기 위해선 동백나무 사이의 좁은 암반을 에둘러가야 한다. 육중한 석문이 버티고 있는 사잇길을 오르면 올벚나무가 그 위에 기세등등하게 자리하고 있다. 올벚나무로 가는 길에는 어른 허리통만 한 동백나무가 시왕처럼 양편으로 도열해 있고, 길바닥에는 붉은 동백꽃이 하염없이 뿌려져 있다.

 

 

겨우 열 발자국 내딛을 정도의 짧은 길이지만 숨이 멈춘 듯 깊은 고요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문을 통과하면 마치 극락의 세계라도 열릴 것 같다.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열 걸음을 걷고 나자 앞은 벼랑이다. 이번에는 몸을 홱 돌려 붉은 양탄자가 깔린 돌층계를 올라야 한다. 널따란 땅에 흙이 수북이 쌓인 곳, 올벚나무는 의연했다.

 

 

스님이 심은 군사용 올벚나무

어찌하여 이곳에 올벚나무가 있을까. 이곳뿐만 아니라 화엄사 계곡에는 유난히 올벚나무가 많다. 그 연유는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가 조선 인조와 효종 때의 일이다. 북벌을 꿈꾸던 왕은 많은 무기를 생산하고자 벚나무 심기를 장려했고, 그 뜻을 받들어 벽암 각성(1575~1660) 선사가 이곳 화엄사 근처에 많은 올벚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군사용 숲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벚나무는 목재가 단단하여 창, 칼자루, 마구(馬具) 등으로 사용되었고, 그 껍질을 벗겨 활을 만드는 등 무기의 재료로 중요한 나무였다. 이 올벚나무는 그 당시 심었던 것 중에서 살아남은 나무로 보고 있다. 원래 두 그루였는데, 약 80년 전에 절을 중수할 때 한 그루를 베어서 목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때 베어낸 나무로 적묵당의 안마루를 깔고도 남았다고 하니 얼마나 큰 나무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벽암 각성은 어떤 스님이기에 수행자의 신분으로 무기 제조의 원료인 올벚나무를 절 주위에 심었던 것일까. 스님의 행적을 보면 왜 이곳에 올벚나무가 심겨졌는지를 알 수 있다.

 

벽암 선사는 조선 중기의 선승으로 14세에 출가하여 당시 청허 휴정(1520~1604) 선사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던 부휴 선수(1543~1615) 선사에게서 사사했다. 벽암 선사는 나중에 부휴 선사의 제자 7백여 명 가운데 가장 번창한 문하를 이루었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전에 참여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다시 수행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지리산에서 수행했다. 1624년(인조 2)에 왕이 남한산성을 쌓게 했을 때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려들을 동원하여 3년 만에 완성했다. 임진왜란 때 불탄 지리산 화엄사를 복구한 것도 벽암 선사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자 승려 3000여 명을 모아 항마군을 조직하고 북상하는 도중에 왕이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기도 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벽암 선사의 이러한 행적을 볼 때 화엄사 일대에 왜 군사용인 올벚나무가 많이 심겨졌는지 충분히 납득이 된다. 벽암 선사는 그 후 여러 사찰을 편력하다가 화엄사에서 입적했다.

 

 

피안앵 혹은 사홍목

이 올벚나무는 세상의 번뇌를 떠나 열반에 도달하는 나무라 하여 스님들 사이에선 ‘피안앵彼岸櫻’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혹은 벽암 선사가 불교의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뜻하여 심었다 하여 ‘사홍목(四弘木)’이라고도 한다. 무리지어 피는 벚꽃의 아름다움에만 익숙한 세상 사람들에게 단 한 그루의 나무가 뿜어내는 아취가 이토록 장엄할 수 있다는 걸 이 올벚나무는 보여주는 듯했다. 마치 저쪽 언덕에 서서 피안의 세계로 어서 오라고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손짓하는 인자한 부처님 같다.

 

 

가까이서 보니 나무는 땅에서 두 줄기로 크게 갈라져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땅속 깊숙이 제 몸을 박고 뭇 생명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하늘을 향하고 있는 올벚나무를 보니 언뜻 지장보살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난 어머니와 가엾은 중생들을 위해 전 재산을 내어주고 그도 모자라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주고 정작 자신의 알몸을 땅속에 갈무리한 지장보살(地藏菩薩). 모든 중생이 구원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큰 서원처럼 올벚나무는 장대했다.

 

 

철수개화(鐵樹開花)라고 했던가. 문득 쇠처럼 검은 올벚나무에 핀 벚꽃이 신이하게 보였다. 이 나무가 혹 쇠나무가 아닐까. 쇠나무가 꽃을 피운 것은 아닐까. 분별심을 버리고 만법을 하나로 보고, 생사를 초월하는 무차별 평등의 절대적 경지에 이르면 쇠나무에서 꽃이 핀다고 했지 않은가.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 화엄사는 온통 꽃들의 축제이다. 장엄한 꽃들의 세계, 여기가 곧 화엄세상이다.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

 

올벚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벚나무 중에서는 꽃이 가장 먼저 피어서 ‘올벚’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황해도 장산곶, 전북 완주 위봉산, 지리산, 전남 보길도, 제주도 등에 분포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는 화엄사 지장암에 있다. 1962년 12월에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는 5m 정도이다. 수령은 350여 년으로 추정된다. 나라 안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벚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 나무 주위에는 서어나무, 동백나무, 팽나무, 갈참나무, 수리딸기 등의 다양한 수종이 함께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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