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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산중정원처럼 고요한 지리산 내원사

 

 

 

 

산중정원처럼 고요한 절집, 지리산 내원사

 

지리산 덕산 유덕골. 호리병의 병목처럼 좁은 입구와는 달리 안으로 들어서면 산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제법 너른 분지가 있는 마을이다. 야트막한 산이 사방을 둘러싸고 그 바깥으로 지리의 높은 산들이 한 번 더 에워싼다. 그 정점에 천왕봉이 늠름한 자태를 드러내는 이 고장은 큰 선비 남명 조식의 서기가 서린 예로부터 복지로 꼽던 곳이다.

 

 

이 복된 땅에서 대원사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어느 순간 들판은 사라지고 땅은 이내 좁아진다. 다시 깊은 산중의 외딴 길, 그 끝에서 작은 사찰 내원사와 마주하게 된다. 계곡을 따라 간 길은 2.6km. 1632년 부사 성여신이 지은 <진양지>에는 덕산사가 ‘덕산촌 위 5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거리로 환산을 해도 대략 일치한다.

 

 

내원사는 사찰이라고 하기에는 작고, 암자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큰 산사이다. 지리산 사찰 중 그나마 세인들의 발길이 덜한 곳이다. 최근에 바로 아래 캠핑장이 생기고 여름이면 물놀이 인파로 붐비지만 그때를 제외하곤 세상의 소란스러움은 계곡 물소리에 묻혀 산사는 늘 고요하다.

 

 

온통 초록이다. 가을이 이미 문턱을 넘어섰음에도 산중의 절집은 아직 초록이다. 자동차의 엔진을 끄자 모든 것이 일순간 적막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창을 여니 우렁찬 계곡의 물소리가 순식간에 밀려왔다.

 

 

“공양 좀 하시지요.”절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아주머니 둘이 아는 체를 한다. 공양주인가 했는데 부산에서 온 신자란다. 마치 제집인 양 거리낌 없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내남 구분 없는 무등의 세상이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절밥이라는 말에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신 설거지는 하셔야 됩니다.”

비록 억셌지만 정이 푹 묻어나는 경상도, 그것도 부산 말투였다. 전국의 사찰을 가보면 불심이 강한 사람들로 경상도, 특히 부산 불자들을 당할 자는 없다. 강원도 백담사에 가도, 전라도의 어느 외진 사찰에 가도 어김없이 부산 불자들을 쉬이 만날 수 있다. 오죽했으면 전라도 사찰은 경상도 불자 없으면 유지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겠는가.

 

 

 

 

물소리를 따라 계곡을 내려갔다. 내원사는 장당골과 내원골의 두 골짜기 몰이 모여드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절묘한 산사의 풍경은 500년 전에도 똑같았던 모양이다. 1487년 9월 27일에서 10월 13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한 남효온은 <지리산일과>에서 덕산사(내원사)에 대해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절은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언덕에 있는데 대나무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왼쪽에 있는 냇물은 웅덩이에 고였다가 다시 흐르는데 그곳을 ‘용연’이라 하였다. 오른쪽에 있는 폭포는 물이 떨어져 여울을 이루는데 ‘부연’이라 하였다.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이 깊었다.”

 

마치 지금의 내원사 풍경을 기록한 것처럼 오늘날의 모습과 똑같이 묘사된 옛 풍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남효온이 다녀간 먼 훗날 절은 폐사가 되어 1959년에야 다시 세워지는 곡절을 겪게 되지만 자연은 늘 한결같았다. <진양지>에는 추강 남효온의 글(다른 판본으로 보인다)을 인용하면서 ‘그 위에 반석이 있어 평평하고 발라서 나무 그늘 아래에 백 명이 앉을 만하다’고 적고 있다. 그 너른 반석이 지금의 ‘명옹대(明翁대)’이다. 백 명은 과장되었지만 수십 명은 너끈히 앉을 정도로 넓고 평평한 바위가 지금도 계곡 가에 그대로 있다. 또 ‘4․5리가 되는 골짜기 입구 좌우의 냇돌이 험하고 기이하여 매우 볼 만하다’고 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내원사로 들어오는 길은 선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내원사로 불리지만 당시는 덕산사였다. 덕산사라는 이름은 그 후에도 더러 문헌에 등장한다. 1651년 11월 지리산을 유람한 오두인은 <두류산기>에서 ‘덕산사의 승려 수십 명이 임무를 교대하여 우리를 맞이하러 왔다(德山寺僧數十人替迎而來)’고 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덕산사가 광해군 1년인 1609년에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전하고 있어 1651년에는 이미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이는데 덕산사의 승려가 마중을 나왔다고 한 것이다. 아마 오두인이 다른 사찰의 승려를 덕산사 소속으로 잘못 알고 기록했을 수도 있겠다.

 

 

그로부터 70년 뒤인 1719년 5월 지리산을 유람한 신명구는 그의 <유두류일록>에서 ‘불장암 골짜기를 출발해 2리쯤 가니 덕산사가 있었다. 절터(古基)와 계담, 암석이 볼 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선 덕산사를 이미 폐사된 옛 절터(古基)로 기록하고 있다.

 

 

1825년 김선신의 <두류전지>에도 덕산사를 기록했으나 <두류전지>는 직접 가서 보고 적은 기행문 형식의 유산기가 아닌 기존의 자료를 종합하여 지리산에 대해 적은 산지였다는 데서 절의 폐사 여부에 대한 정확성은 기대할 수 없다. 1632년 부사 성여신이 지은 <진양지>에도 덕산사가 ‘덕산촌 위 5리에 있다.’고 간단히 그 위치만 언급하고 있어 폐사 여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비로자나불은 세월의 풍파를 이미 달관하고 있는 모습이다. 상처투성이 몸이지만 화엄불의 주존불로서 위엄을 잃지 않고 있다. 어디서나 두루 비치는 광명. 원만하고 자비로운 얼굴 표정과 안정감 있는 풍모에 왼손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의 수인에선 엄숙함이 엿보인다. 승과 속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이(不二),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손 모양이 당당하다.

 

 

세월 속에 견뎌온 것은 불상만이 아니다. 대웅전 옆에는 1950년대에 도굴꾼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61년 복원해 놓은 석탑 한 기가 있다. 비록 지붕돌이 부셔지고 상륜부가 남아 있지 않지만 보물 제1113호로 지정된 당당한 석탑이다. 철분이 많아 인근 대원사의 석탑만큼 이 탑도 붉다. 지리산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곳 내원사의 유물들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몇몇 석재들에서도….

 

 

 

순간순간은 아픔이었고 상처였지만 역사의 장대한 흐름에선 일순간의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오히려 그 상처로 인해 그것의 가치는 한층 돋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이 두 보물로 인해 지리산의 작은 절 내원사는 더욱 속 깊은 산사가 된 듯하다.

 

 

 

 

<보왕삼매론>에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다.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쉬울 터,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고 했으니 그 말씀이 여기에도 꼭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그래서일까. 절 마당 한편에 <보왕삼매론>이 걸려 있다.

 

 

“참, 무료하네!”

적막을 깨는… 무심코 내던진 일행의 한마디가 귓가를 울린다. 몇 시간째 멍하니 앉았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무료하다? 그래 무료해야지. 삶은 본래 무료한 것인데, 무료함을 느끼는 것이 본디 정상적인 삶인데, 그걸 견디지 못하다니…. 무료함을 느끼지 못하는 오늘날의 우리네 삶을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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