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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애불

지리산 뜯어온 불상, 그 기구한 사연

 

 

 

 

지리산 내원사의 ‘뜯어온 불상’, 그 기구한 사연

 

지리산 장당골 내원사. 대웅전 옆 층계를 오르면 비로전이다. 비로전에선 아주 특별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보물 제1021호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상이 그것이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풍모를 가진 불상이다. 근데 아무리 둘러봐도 부자연스럽다. 등은 누가 일부러 깎은 듯이 직각이고 엉덩이는 살짝 들린 데다 무릎 부분도 깎여 나갔고 광배는 부러진 상태에다 목에는 시멘트로 깁스를 했다. 도대체 이 불상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기에 온통 상처투성이란 말인가?

 

 

원래 이 불상은 내원사에 있었던 불상이 아니다. 1947년 석남리에 사는 이성호 형제는 나무하러 갔다가 험준한 벼랑에서 불상을 발견하게 된다. 형제는 이 불상을 옮기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무게를 줄여 쉽게 가져가려고 무릎 밑과 등 부분을 깎아 버렸다. 즉 광배와 좌대를 몸통과 분리해서 뜯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인근 마을에서는 이 불상을 ‘뜯어온 불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가져온 불상은 약 10년 동안 그들의 집에 보관했다가 내원사 중창 때 주위의 권유로 내원사에 양도하여 옮겼다고 한다. 그들이 갔던 벼랑은 폐사지인 석남사였다.

 

 

뜯어온 상태에서 내원사에 방치되다시피 있었던 불상은 1966년 내원사에 들른 신라오악학술조사단에 의해 비로자나불로 판명되었다. 당시 조사단은 광배와 대좌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그 후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 중이던 ‘영태2년명납석제사리호’(국보 제233호)에 새겨진 명문을 보고 본래 불상이 있었던 곳이 석남사 관음전 터임을 알고 좌대와 광배를 찾게 되었다. 상처 난 곳은 시멘트로 붙이고 좌대에 불상을 앉히고 광배를 붙여 비로전에 모셨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사리호에 쓰인 글자를 근거로 연구한 결과 이 사리호가 애초 내원사 비로자나불상 안에 안치되었던 것이며, 불상은 신라 혜공왕 2년인 776년에 제작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로자나불로 판명되었다. 사리호는 불상의 좌대 중대석 중앙의 구멍에 봉안되어 있었다. 모두 15행 136자의 이두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766년 법승, 법연 두 스님이 젊어서 죽은 두온애랑 소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남암사 관음바위(절벽)에 비로자나석상을 안치한다’는 내용이다. ‘두온애랑’은 화랑으로 추정되며 젊어서 죽은 그를 애석하게 여긴 부모가 비로자나불을 제작하여 안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사리호의 발견으로 당시 지리산의 노고단과 세석고원이 화랑들의 수련장이었다는 설은 힘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석남사는 어디쯤일까. 조선시대의 문헌에선 석남사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1632년에 성여신이 지은 <진양지> ‘불우’ 편에 석남사에 대한 기록이 한 줄 보인다. <진양지>에는 ‘本石南寺在德山長堂洞廢久, 본래 석남사는 덕산 장당골에 있었는데 폐사된 지 오래됐다’고 적고 있다(진양지 한글 번역본에서는 ‘本’자를 절 이름으로 오인하여 ‘석남사’를 ‘본석남사’로 잘못 적고 있다.). 오늘날의 내원사 장당골에서 오르거나, 석남상촌마을(삼장면 석남리)에서 오르면 900고지 능선에 제법 너른 절터가 있는데, 이곳이 석남사 터로 추정되고 있다.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비로자나불은 세월의 풍파를 이미 달관하고 있는 모습이다. 상처투성이 몸이지만 화엄불의 주존불로서 위엄을 잃지 않고 있다. 어디서나 두루 비치는 광명. 원만하고 자비로운 얼굴 표정과 안정감 있는 풍모에 왼손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의 수인에선 엄숙함이 엿보인다. 승과 속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이(不二),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손 모양이 당당하다.

 

 

세월 속에 견뎌온 것은 불상만이 아니다. 대웅전 옆에는 1950년대에 도굴꾼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61년 복원해 놓은 석탑 한 기가 있다. 비록 지붕돌이 부셔지고 상륜부가 남아 있지 않지만 보물 제1113호로 지정된 당당한 석탑이다. 철분이 많아 인근 대원사의 석탑만큼 이 탑도 붉다. 지리산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곳 내원사의 유물들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몇몇 석재들에서도….

 

 

순간순간은 아픔이었고 상처였지만 역사의 장대한 흐름에선 일순간의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오히려 그 상처로 인해 그것의 가치는 한층 돋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이 두 보물로 인해 지리산의 작은 절 내원사는 더욱 속 깊은 산사가 된 듯하다. <보왕삼매론>에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다.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쉬울 터,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고 했으니 그 말씀이 여기에도 꼭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그래서일까. 절 마당 한편에 <보왕삼매론>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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