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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고요한 사찰, 선원사

 

 

 

 

 

 

남원시 한복판에 자리한 고요한 사찰, 선원사

 

지난 유월, 남원을 다녀왔다. 3일간 남원시내에서 벌어진 춘향제를 보고 마지막 날 선원사에 들렀다. 선원사는 남원 시내 가운데에 있다. 대개의 사찰이 산에 있다는 생각에 도심에서 만나는 사찰은 당혹스럽기도 하다.

 

 

사실 지금이야 선원사가 시내 한가운데인 도통동에 있지만, 예전에는 선원사는 산의 끝자락에 있었다. 만행산의 산기슭에 있었던 절은 도시가 팽창하면서 주위에 집들이 들어서고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이미 선원사를 몇 차례 다녀갔지만 언제 와도 이곳은 고즈넉하다. 차들이 오가는 도로가 있지만 문을 들어서는 순간 속세와는 단절된 고요함이 깃든다. 가지가 붙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눈길을 끈다.

 

 

‘만행산 선원사’라는 현판이 달린 문을 들어서면 대웅전과 약사전, 칠성각, 명부전 등이 자리한 조촐한 경내가 나타난다. 종으로 배치되어 있는 일반적인 사찰구조와는 달리 선원사는 횡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선원사는 예부터 남원팔경의 하나로 꼽혀 왔다. 남원을 대표하는 사찰은 만복사와 선원사가 있다. 수백의 승려가 아침에 시주 받으러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이 장관인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과 해질녘에 은은히 들려오는 선원사의 종소리를 꼽는 ‘(선원모종禪院暮鐘)’이 그것이다.

 

 

소담한 경내와는 달리 이 작은 절의 속은 옹골차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19호인 약사전과 그 안에 모신 고려시대의 철불인 보물 제422호 철조여래좌상, 전북 문화재자료 제45호 대웅전과 그 안에 있는 조선시대 말기에 만든 전북 유형문화재 제25호인 동종이 있다.

 

 

신라 헌강왕 1년(875)에 도선국사가 세운 선원사는 처음 진압사찰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남쪽의 산천을 유람하다가 남원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보니 객산인 교룡산이 힘이 세고 주산인 백공산이 너무 허약하여, 지세를 돋우고자 선원사를 비롯하여 만복사, 대복사를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선원사가 자리한 백공산은 만행산의 한 줄기에 불과한데 굳이 만행산이라 한 것은 큰 산의 힘을 빌려 교룡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함이었다고 전한다.

 

 

이 유산들만 보아도 예전에는 제법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만복사와 함께 불타 버린 뒤 1754년(영조 30)에 다시 짓고 철불을 약사전에 모셨다고 한다.

 

 

 

약사전에 있는 철조여래좌상은 높이 1.2.m 정도로 대좌와 광배는 없고 불신만 남아 있다.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금칠을 하여 마치 금동불처럼 보인다. 동종은 대웅전 안에 있는데 높이 66cm 정도로 조선시대의 범종이다.

 

 

대웅전과 약사전은 둘 다 사람 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용마루와 처마의 선이 직선에 가까워 작은 건물임에도 무거운 느낌을 준다. 맞배지붕에 흔히 보이는 풍판이 옆에 달려 있다. 비와 바람을 막기 위한 용도이다. 약사전에는 철불을, 대웅전에는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의 주불을 옮겨 모시고 있다.

 

 

 

그 외에도 괘불이 약사전 뒤에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앞의 석탑은 1960년대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선원사는 남원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절이 도시 가운데에 있는 것이 말해주듯 예부터 남원시의 번영은 곧 선원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요사에서 아침 공양을 했다. 깔끔하니 잘 차려진 밥상이다. 공양이 끝나자 잘 우린 돼지감자차를 내어온다. 선원사에서는 청정한 지리산에 돼지감자를 키우고 있다.

 

 

주지 스님인 운천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운천 스님은 ‘착한스님짜장’으로 전국 각지를 돌며 짜장 봉사를 하고 있다.

 

 

‘착한스님짜장“ 운천 스님의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