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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정원

솔숲이 장관인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





아름다운 솔숲,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7번국도. 자동차가 곧잘 내달리는 이곳에 남북으로 길게 누운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다. 누에고치처럼 허리가 잘록하고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낮은 산임에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이 산은 옛 신라의 중심지였던 낭산이다. 이곳 산자락에선 천 년 전 왕릉들과 많은 유적지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진평왕릉, 효공왕릉,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신무왕릉, 성덕왕릉, 효소왕릉, 사천왕사지….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는 낭산은 기껏해야 100m남짓한 산이다. 그럼에도 예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다. 신라 건국 초부터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 낭산에 왕릉들이 자리 잡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낭산이 경주의 진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웅장한 산은 아니지만 경주의 중심에서 가까운 오랜 역사를 가진 산으로 인식해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실성왕 12년(413) 가을 8월에 낭산에서 구름이 일어 누각과 같았고 향기가 자욱하여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왕은 이곳을 신령이 노니는 복 받은 땅으로 여기고, 그 후로는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명인 백결선생이 살았으며, 문창후 최치원이 공부하던 독서당도 있다.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의 능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호국사찰로 알려진 신라 향가의 현장 사천왕사 터가 있다. 들판 너머로 봉긋 솟은 곳에 신문왕릉과 효공왕릉이 있다.


동북쪽에는 황복사 터와 삼층석탑, 진평왕릉, 설총묘가 있으며, 서쪽 중턱에는 낭산 마애삼존불이 있고, 그 주변에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보문사지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사천왕사지에서 좁은 길을 따라 선덕여왕릉을 찾았다. 들판을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서자 별세상이다. 여태까지의 허허로운 들판 풍경은 사라지고 짙은 울창한 솔숲이 모습을 드러낸다.


 

구불구불 제멋대로 굽은 소나무이지만 오랜 세월 왕릉을 지켜온 솔숲은 위풍이 당당하다. 이따금 불어대는 날카로운 바람조차 바깥에서 윙윙 소리를 낼 뿐 숲은 침범하지 못한다. 숲이 만들어내는 영험함과 신선한 기운에 절로 순례자가 되어 엄숙한 발걸음을 옮긴다.




산등성이 숲의 끝에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능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아랫부분에 2~3단으로 얼기설기 쌓은 자연석 석축이다. 인근에 있는 다른 왕릉의 잘 다듬어진 석축과는 달리 이 왕릉은 수수하기 그지없다. 신문왕릉에서 보이는 호석도, 통일신라시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십이지신상도 없다. 이들보다 앞선 시기의 왕릉임을 석축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에 대한 이야기는 코흘리개도 알고 있다. 신라 최초의 여왕이었고, 김춘추와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고, 첨성대를 만들었고, 분황사를 창건했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는 등 신라의 주요 건축물이 선덕여왕 시대에 만들어졌다.

 

『삼국유사』에는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장자지내 달라고 선덕여왕이 유언했는데 신하들이 어디인지를 몰라서 물으니 왕이 안산 남쪽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문무왕 19년(679)에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지었다. 불경에 도리천이 사천왕천의 위에 있다고 했으니 선덕여왕이 신통하고 신령스러운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