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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엘리자베스여왕 방문 이후 10년 만에 다시 찾은 봉정사

 

 

 

엘리자베스 여왕 방문 이후 10년 만에 다시 찾은 봉정사

 

봉정사. 한때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던 산사였다. 예의 그 고요하고 고즈넉함 때문이었다. 고요한 산사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봉정사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촬영지가 되면서 아름아름 알려지기 시작하더니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한 후 깊은 산사는 밀려드는 방문객들로 그야말로 야단법석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 여행자는 발길을 끊었다. 벌써 10년을 훌쩍 넘긴 시간이다. 모처럼 봉정사를 찾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왠지 모를 아련한 그리움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사람이 붐빌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산사 초입은 한산했다. 주차장 주위에 새로이 생긴 건물 두엇을 제외하곤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산사로 가는 산길에도 여전히 쇠사슬을 걸어 차량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봉정사는 낙타의 굽은 등을 타고 오르듯 등성이를 두 번 올라야 한다. 솔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오르면 널찍하니 평평한 곳에 일주문이 있다. 여기서 다시 참나무가 숲을 이룬 등성이를 오르면 오른쪽으로 길은 휘어진다. 길 왼편 가파른 산언덕 높이 하늘에 걸린 누각 한 채가 보이는데 이곳이 이름 하여 천등산 봉정사이다.

 

 

봉정사는 낙타의 굽은 등을 타고 오르듯 등성이를 두 번 올라야 한다. 솔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오르면 널찍하니 평평한 곳에 일주문이 있다. 여기서 다시 참나무가 숲을 이룬 등성이를 오르면 오른쪽으로 길은 휘어진다. 왼편 가파른 산언덕 높이 하늘에 걸린 누각 한 채가 보이는데 이곳이 이름 하여 천등산 봉정사이다.

 

 

만세루 아래를 지나면 누마루 아래와 돌층계 사이의 빈 공간으로 대웅전이 점점 모습을 드러낸다. 부석사의 안양루 아래를 지나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긴장감이 예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건물 아래로 들어가려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면서 자세를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누각 아래로 들어가는 문들은 경사진 지형에 지어진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만세루를 지나 대웅전 마당에 들어섰을 때 그 정갈한 모습에 작은 탄성을 지르게 된다. 좌우 건물의 끝에 우뚝 솟은 대웅전은 그다지 위압적이지 않으면서 위엄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탄성은 그 뒤에 나온다. 마당에서 몸을 돌려 만세루를 돌아보는 것이다.

 

 

만세루의 5칸 너른 누마루는 시원도 하거니와 기둥 사이로 보이는 경치가 일품이다. 승과 속, 안과 밖의 구분을 위해 누를 세웠겠지만 정작 이 누마루를 통해 자연은 절마당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다.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 것이다.

 

 

승방인 화엄강당과 무량해회당을 지나 대웅전에 오른다. 대웅전은 보물로 있다가 몇 해 전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승격된 건물이다. 대웅전에서 눈에 뛰는 건 건물 앞쪽의 쪽마루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집의 사랑채에나 있을 법한 난간을 두른 마루가 법당에 있다는 게 생소하다. 대개의 사찰에서 법당 좌우의 문으로 곧장 법당을 출입하게 한 것과는 달리 이곳은 쪽마루를 내어 출입을 하도록 한 것이다.

 

 

쪽마루는 앞으로 난간을 둘러 가벼움을 지양했고 아주 낮게 만들어 누구나 손쉽게 오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오랜 마루를 걸어 법당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그윽하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아름다운 건물임에도 단청이 퇴락해서 극락전보다 더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긴다.

 

 

화엄강당을 돌아가면 또 하나의 공간이 나온다. 그 유명한 극락전이 가운데에 배치되어 있고, 좌우로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양 날개를 이루고 있는 극락전 영역이다. 봉정사는 이처럼 화엄강당을 중심축으로 대웅전 영역과 극락전 영역의 두 축이다. 한 절에 중심이 둘 있는 배치는 매우 드물다고 하겠다. 금당 끝 언덕 아래로 종루가 보인다.

 

극락전을 보기 전에 고금당을 먼저 살필 일이다. 극락전은 그 자체로 워낙 유명하다 보니 보는 이의 안목과는 상관없이 고평가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공부할 이라면 고금당을 살피고 난 후 극락전을 꼼꼼히 보는 게 외려 극락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고금당은 이름부터 특이하다. ‘옛 금당’인 셈인데, 금당은 삼국시대에는 절의 중심 건물로서 불상을 봉안한 건물을 일컫는 말이었다. 극락전과 대웅전이 들어서기 전에 봉정사의 초창기 금당 자리가 아닌가 싶다. 서까래를 바치는 도리가 길게 뻗어 나와 공간이 한층 깊어 보인다.

 

 

그 유명한 극락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의 단정한 맞배지붕집이다. 알려진 대로 12세기 중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14세기 중엽에 중수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그 단순한 구성이 지극히 단정하고 단아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지니고 있다는 봉정사의 상징성이 이 절의 유서 깊음을 드러내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고려 중엽의 건물인 극락전, 조선 초기의 대웅전, 조선 후기의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있어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라는데 여행자는 더 의미를 주고 싶었다.

 

 

극락전과 대웅전 사이에 불상 하나가 놓여 있다. 그 불상은 마치 두 곳의 중심 사이에서 번뇌한 듯 해탈한 듯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무슨 연유일까. 옆에서 본 대웅전은 문이 둘로 나 있다. 대개의 법당이 옆면 앞쪽으로 문이 하나 나 있는 데 비해 이곳은 옆면 두 군데에 출입문이 있다. 무슨 이유일까.

 

 

대웅전과 극락전을 둘러본 후 산세를 조감하기 위해 언덕을 올랐다. 고금당 뒤 산기슭에 고목 한 그루와 낡은 건물이 한 채 보인다. 산신각이다. 고졸하기 그지없는 산신각을 보고 있자니 여태 보았던 봉정사의 숱한 국보와 보물들보다 더 마음이 간다. 무슨 이유일까. 특별히 뛰어난 걸작도, 그렇다고 해서 오래된 가치가 있는 것도, 시선을 끄는 그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을 뒤흔든다.  

 

지극히 단순한 구성, 검박한 외양… 퇴락할 대로 퇴락한 모습에 절로 눈길이 간다. 봉정사에 빼어난 수작들이 많으니 되레 이런 수수한 전각에 오히려 마음이 가는 것일까. 오래된 고목과 퍽이나 잘 어울린다. 

 

 

 

산사를 내려다본다. 이곳에 오르니 산들에 빙 둘러싸인 산사가 더없이 아늑한 곳임을 알겠다. 해회당 옆 마당 구석에는 초가지붕을 이고 장독대가 묻혀 있다. 예전에도 그랬었다. 영산암으로 발길을 옮겼다.

 

 

☞ 봉정사는 672년(문무왕12)에 의상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그의 제자인 능인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혹은 능인)이 도력으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렸는데, 종이 봉황이 앉은 곳이 지금의 봉정사였기에 이곳에 절을 지어 봉정사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내에는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등의 문화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