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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이승휴가 은둔하며 '제왕운기'를 집필한 천은사

 

 

 

이승휴가 은둔하며 『제왕운기』를 집필한 천은사

 

삼척에서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고즈넉한 절집 천은사를 만난다. 이승휴가 은둔하며 『제왕운기』를 집필했다는 이 오랜 산사는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다.

 

 

산사로 가는 외진 길은 한갓진 풍경의 연속이고 민가 두어 채를 지나면 이내 깊은 산속이다. 초입의 쭉쭉 뻗은 침엽수림도 잠시, 아름드리 활엽수들이 시커먼 몸통을 드러낸 채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숲길 끝에 조붓조붓한 오솔길이 하나 보이는데 봄이면 연분홍 꽃을 흐드러지게 피울 벚나무들이 양쪽으로 길을 내고 있다. 처음의 흙길에서 잔자갈이 깔린 오솔길을 자분자분 걷다 보면 곧장 통돌이 깔린 길로 이어진다. 이 짧지만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오솔길에서 이미 산사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잠시 옷깃을 여미고 서걱서걱 밟히는 낙엽소리에 이끌려 고색이 물씬 풍기는 돌층계를 올라서면 정원처럼 잘 가꾼 정갈한 천은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경내에 있는 전각이라고 해봐야 극락보전과 육화전, 영월루, 약사전, 삼성각, 요사가 전부다.

 

 

동은 스님과 진돗개 보리의 느긋함과 한가로움을 따르다 잠시 영월루에 올라 다리를 쉰다.

 

 

절집은 어디 하나 허투루 쓰인 곳도 없을 뿐더러 어디 하나 어지러운 곳도 없다. 육화전 방문마다 내린 발조차도 정연하기 이를 데 없다.

 

 

약사전은 또한 어떠한가. 소나무 아래에 학이 노닐고 푸른 대나무와 매화가 만발한 꽃창살은 차라리 한 폭의 그림에 가깝다.

 

 

절의 제일 뒤 삼성각에 오른다. 삼성각에서 내려다보니 골짜기 깊숙이 자리한 천은사가 그윽하다.

 

 

동은 스님에게 이승휴가 머문 곳이 어디인 지를 물었더니 외딴 요사를 가리킨다. 이승휴는 지금의 천은사 자리에 용안당을 지은 뒤 은둔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제왕운기』라는 대서사시를 쓰게 된다. 대몽항쟁기에 단군이라는 뿌리에서 나온 우리 겨레가 중국 못지않게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훌륭한 민족임을 강조하고, 통치자로 하여금 선정을 펴도록 한 이 책은 비록 짧지만 발해사를 다루어 발해를 우리 민족사의 범주에 든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혔다는 데 의미가 깊다.

 

 

가리 이씨의 시조이기도 한 이승휴는 자가 휴휴이고, 호는 동안거사이다. 그가 머문 용안당은 자신의 별장을 절에 시주하면서 간장암으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대장경을 다 읽었다는 뜻이겠다.

 

 

그 후 선조 31년(1598년)에 서산대사가 절을 중건할 때, 절의 서남쪽 봉우리가 검푸르다고 하여 흑악사라 하였다가 1899년 이성계 4대조의 묘인 목조릉을 미로면 활기리에 만들면서 이 절을 원당으로 삼고, '하늘의 은혜를 입었다' 하여 천은사라 불렀다고 한다.

 

 

천은사의 창건 당시 이름은 백련대였다. 인도에서 온 세 명의 승려인 두타삼선이 신라 경덕왕 17년(758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타삼선 중 1명은 금련(金蓮)을 가지고 와서 영은사(靈隱寺)를 지었고, 다른 1명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와서 삼화사(三和寺)를, 나머지 1명은 백련(白蓮)을 가지고 와서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절 아래에 있는 이승휴 유적지로 발길을 옮겼다. 날이 가물어 계곡에 물은 없지만 깊은 원시림 속이라 정취만은 그윽하다.

 

 

 

오래되어 밑이 뚫린 돌확하며, 바위 위에 그대로 새긴 맷돌, 아직도 소가 우직하게 돌릴 것 같은 연자방아, 계곡물을 이용해 방아를 찧는 굴피집 방아들이 잠시 시간을 잊게 한다.

 

 

숲 곳곳에 널브러진 가재도구들을 보며 이승휴가 머물던 옛 고려의 정원을 연상한다. 계곡물을 방앗간과 연못으로 끌어들이는 나무로 만든 홈통이 숲의 긴 시간을 따라 이어진다. 마치 긴 시간을 거슬러 옛 고려로 안내하는 듯하다.

 

 

유적지 앞 연못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오랜 세월이 읽힌다.

 

 

이승휴의 사당이 있는 동안사에서 때 묻지 않은 울창한 숲속을 바라보며 옥구슬 같은 계곡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원시림 속에 묻혔다 들렸다 반복하며 고요한 숲을 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