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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기어코 딸아이를 울린 천은사의 '보리'

 

 

 

기어코 딸아이를 울린 천은사의 '보리'

- 삼척 천은사에서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집필하며 은둔했다는 오랜 산사를 찾았습니다. 삼척에서 구불구불 계곡을 따라 한참이나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고즈넉한 절집, 천은사입니다. 짧지만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오솔길이 산중의 깊은 고요로 이끌었습니다.

 

 

이따금 두타산을 찾는 등산객들을 빼고는 산사는 조용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가을날의 오후를 무심히 보내긴 이만한 곳도 없겠다 싶습니다.

 

 

산사 이곳저곳을 느릿느릿 걷고 있는데 스님이 절마당에 나타났습니다. 노랑머리의 외국 여인이 깊게 합장을 합니다. 스님 뒤를 누런 개 한 마리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여행자의 시선도 어느새 스님과 개를 따라갔습니다. 그러곤 잠시 뒤 요사채 뒤로 스님과 개가 사라졌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저도 극락보전을 돌아 삼성각에 올랐습니다.

 

 

삼성각에 오르면 천은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첩첩산중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적막의 풍경에 여행자는 스스로 침묵에 빠져들었습니다.

 

 

절마당으로 내려왔을 때 육화전 처마 아래에서 스님과 진돗개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스님대로, 개는 개대로 명상이 깊었습니다.

 

 

그 깊고 고요한 풍경을 깨뜨릴까 두려워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며 사진에 담았습니다.

 

 

침묵과 적막이 감싸는 그 풍경은 어느 말보다도, 어느 글보다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습니다.

 

 

외국인 남자가 스님과 진돗개의 명상을 찍고, 그 남자의 사진 찍는 모습을 다시 외국인 여자가 찍고, 그 여자의 사진 찍는 모습을 다시 여행자가 찍었습니다.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모든 모습 또한 수행의 한 방편으로 여기는 듯했습니다. 할 일을 마친 듯 개는 축담에 몸을 뉘여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러기도 잠시, 영월루에서 손님을 맞는 스님을 보자 냉큼 달려가서 주위를 서성거립니다. “보리야!” 스님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보리'라는 이름을 가진 진돗개라는 걸 알았습니다.

 

 

“늙어서 그래요. 사람으로 치면 할머니예요.”

 

보리의 눈이 유난히 슬퍼 보인다고 하자 동은 스님이 짧게 말했습니다. 그제야 보리의 눈이 왜 그리 슬퍼 보이는지를 알았습니다.

 

 

스님이 손님과 담소를 나누는 동안 보리는 약간 떨어져 혼자만의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보리가 예쁘다며 딸아이가 자꾸 애정을 퍼붓자 스님 주위만 맴돌던 보리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였습니다. 아무래도 서먹함이 남아 있어서인지 보리는 더 이상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딸아이도 약간은 실망한 듯 그냥 가자고 했습니다.

 

 

근데 그 순간, 뒤를 돌아보니 보리가 느릿한 걸음으로 뒤쫓아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딸아이도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진즉에 애정을 보여줄 용기는 없고, 이제 가려고 하니 서운한 마음이 일어 따라나선 모양입니다.

 

 

그런 보리를 보고 딸아이도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습니다. 한참이나 손을 흔들며 “이제 가야 돼.”라고 단호하게 외쳤지만 보리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딸아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빠, 내가 먼저 가지는 못하겠어."

 

어느새 딸아이의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던 딸아이가 꾀를 내어 바위 뒤에 몸을 숨겼습니다. 보리가 포기하기를 기다리면서요.

 

 

얼마 후, 딸아이가 바위 뒤에 감췄던 몸을 드러냈을 때에도 보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딸아이가 몇 번이나 몸을 숨긴 끝에 보리는 겨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뒤로 자꾸자꾸 고개를 돌리던 딸아이가 절을 내려온 건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나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