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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

가을에 걷기 좋은 수원화성의 가장 아름다운 성곽길

 

 

 

이 가을, 수원화성의 가장 아름다운 성곽길을 걷다

- 수원화성 성곽길 걷기: 장안문에서 화서문, 서장대까지

 

장안문

 

수원을 가면 으레 찾는 곳이 화성이다. 아니 화성을 찾기 위해 수원을 간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다. 수원을 몇 차례나 갔지만 화성 성곽길을 따라 온전히 한 바퀴 돈 적은 없다. 둘레가 5.7km인 화성을 한 번에 다 돌지는 못했지만 이번에 장안문에서 화서문까지 걷게 되어 화성의 온전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장안문은 번잡했다. 성곽 아래로 뚫린 도로의 모습도 생경하거니와 공중에 떠 있는 성곽도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장안문에 올랐다. 수원화성의 4대문 중의 하나인 장안문은 북문에 해당한다. 서울에서 오면 제일 먼저 들어오는 정문으로 그 웅장한 위용이 대단하다. 한양의 숭례문에 견줄 만큼 크고 화려하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함께 우진각지붕을 얹었다. 문 앞에는 벽돌로 옹성을 쌓았고 좌우에는 적대를 쌓아 방어 기능을 높이는 동시에 장엄한 느낌을 들게 했다. 장안문 밖으로는 화서문까지 장안공원이 있어 산책삼아 느릿느릿 화성을 유람하기에 제격이다.

 

 

오늘은 장안문에서 화서문까지 걷기로 했다. 우선 장안문을 안과 밖에서 꼼꼼히 살피고 좌우를 둘러싼 북서적대와 북동적대를 올려다본다. 그런 다음 북서포루, 북포루, 화성이 자랑하는 서북공심돈을 돌아 화서문에 이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아쉬움을 채우기 위해 이번에는 화서문에서 성 안쪽을 걸어 장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성의 안과 밖을 모두 살피고 나니 화성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더 알겠다.

 

북서적대에서 본 장안문

 

이 길을 걸으리라 마음먹은 것은 전날이었다. 연무대에서 화성열차를 타고 이동을 하던 중 여행자의 눈을 매료시킨 건 다름 아닌 성벽이었다. 새로 쌓은 깔끔한 성돌 대신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앉은 검은 갈색의 성돌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제멋대로 생긴 돌을 최소한으로 다듬어 그렝이로 쌓아 올린 성벽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북서적대

 

화성에서도 장안문에서 화서문에 이르는 성벽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걸음은 북서적대에서 잠시 멈췄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 옆에 있는 치성 위에 설치한 방어시설이다. 성에서 가장 방어가 취약한 성문을 옹성이 일차로 보호하고 다시 적대를 좌우에 쌓아 방어했으니 화성의 견고함을 엿볼 수 있는 시설물이라 하겠다. 성 아래 가까이 다가온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위아래로 길게 구멍을 낸 현안과 쌓은 담장마다 총구멍인 총안을 내었다.

 

 

북서포루와 북포루는 한글로는 같은 음인 '포루'로 표기하지만 용도는 다르다. 북서포루(砲樓)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와 더불어 화성에 있는 5개의 3층 포루 중 하나다. 벽돌로 지었는데, 성벽에 대포를 발사하기 위해 구멍을 뚫은 혈석이 있다.

 

 

북서포루

 

 

북포루(鋪樓)는 화성의 5개 포루인 동일포루, 동이포루, 동북포루, 서포루와 더불어 치성 위에 설치한 누의 하나다. 평소에는 군사들의 대기장소이자 휴식공간이었다가 전시에는 감시와 공격을 위해 쓰이는 누각이기도 하다. 아래쪽은 돌로 쌓고 위에는 벽돌로 축조했다. 그 위에 집을 짓고 판자를 깔아 문루를 만들고 좌우에는 활을 쏘는 구멍도 만들었다.

 

북포루

 

성곽 구경에 홀리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 거대한 구조물이 나타났다.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이다. 주위를 압도하는 높이도 그러하지만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생김새가 눈길을 끈다. 공심돈은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망루의 일종이다.

 

서북공심돈

 

1796년(정조 20) 3월 10일에 완공된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아래의 치성은 석재로, 위 벽체는 벽돌로 쌓았다. 화성에는 동북공심돈과 서북공심돈이 있다. 중국 요동지방에 있는 평돈을 모방하여 벽돌로 동그랗게 돈대를 쌓아 만들었다고 한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보물 제402호인 팔달문과 더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된 화서문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 화성의 4대문 중 서문으로,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했다.

 

▲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편액은 초대 화성 유수였던 채제공이 썼으며 특히나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 공사를 담당했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눈여겨볼 만하다.

 

 

화서문을 지나면 여태까지의 평지는 끝나고 팔달산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성벽 높다란 곳에 걸려 있는 서북각루가 인상적이다.

 

 

▲▼ 서북각루

 

 

성곽의 높은 곳에 있는 각루는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하는 시설이다.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한다. 화성에는 방화수류정으로 잘 알려진 동북각루를 비롯해, 동남각루, 화양루로 불리는 서남각루, 서북각루 4곳의 각루가 있다.

 

 

서북각루와 서포루 사이에 있는 서일치

 

 

장안문에서 화서문에 이르는 지금까지의 길이 직선에 가까웠다면 이곳부터는 구불구불한 길이 특징이다.

 

 

▲ 서장대

 

서장대부터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걸으며 서이치, 서포루, 서일치를 지나면 서북각루를 만나게 된다.

 

 

서포루

 

서북각루에 올라 구불구불 이어진 성곽을 내려다보는 맛은 가히 일품이다. 서북각루에서 화서문과 장안문을 거쳐 방화수류정까지 이어지는 이 길이 수원화성 성곽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기도 하다.

 

 

 

서북각루에서 내려다본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일대

 

 

서북각루에서 내려다본 서북공심돈과 옹성으로 둘러싸인 화서문 풍광은 그림이 따로 없다. 수원화성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일대라 하겠다.

 

 

 

성의 밖에서는 갓 피어나기 시작한 억새가 온통 하얗다. 아직 완전히 피지는 않았지만 그 풍경만큼은 근사하기 이를 데 없다.

 

 

하늘과 경계를 지은 성벽과 단조로운 성벽에 한 점을 찍는 서북각루와 서일치는 자연과 인공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절로 깨닫게 한다.

 

 

 

하늘이 주는 하얀 여백과 땅에서 올라오는 초록의 하얀 붓질 사이를 성벽으로 줄을 그어 경계와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은 두고두고 오래도록 남는다.

 

 

서일치

 

그래서일까. 이곳에 이르러 화성을 걷는 즐거움이 절정에 이른다.

 

화성은 화선지에 붓 자락으로 슬픈 숨결을 척척 그어놓은 듯 끊어질 듯 이어져 있다. 성곽은 역사의 아픔을 위안삼아 더욱 온유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화성은 햇살조차 눈부시게 슬프다.

 

마음의 무게를 걷어내고 싶을 때 화성을 걷는다. 화성은 자신의 둥치를 애써 꾸미려 하지 않고, 거무스레한 등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비바람을 잘 견디고 역사의 부침에도 듬직하게 살아왔다. 그곳에 기대어 보면, 침묵으로 영원에 닿아 있는 숨소리를 듣는다. 그 숨결은 온갖 세월의 아픔을 삭여서 사는 우리 겨레의 모습을 닮았다. 화성을 내려오면서 마음속에 돌을 하나씩 쌓아 본다. 어려움을 삭여서 평온을 얻는 것처럼 나도 마음속에 장엄하면서도 부드러운 평화를 쌓아 본다.

- 윤재열의 <화성을 걸으며> 중에서

 

서북각루와 서일치

 

 

이른 아침에 장안문에서 화서문을 지나 서북각루와 서일치를 둘러본 후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서 장안문까지 왕복으로 걸었음에도 아쉬움이 남아 아침식사 후에 서장대에 다시 올랐다. 서장대에서 장안문까지 다시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몇 번이고 돌고 돌아도 매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수원화성이다. 끊어질 듯 이어진 그 생명력과 돌 하나하나에 깃든 숨소리를 들으며 여행자는 오늘도 화성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