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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타임슬립

여행자라면 누구나 찾는 아름다운 간이역, 남평역의 오후

 

 

여행자라면 누구나 찾는 아름다운 간이역, 남평역의 오후

 

경전선 효천역에서 내렸다. 남평역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기 때문이다. 역무원마저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역사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하는 수 없이 무작정 버스정류장으로 걸었다

 

 

오십을 갓 넘겼을까. 한쪽 다리를 저는 중년의 사내에게 길을 물었더니 확신은 못하면서도 꽤나 신경을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남루한 가방을 들어주었다. 마침 버스정류장에 중학생쯤 돼 보이는 통통한 사내아이가 노란색 버스만 타면 남평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다면 버스노선표를 들여다보며 한참이나 헤맸을 것이다.

 

 

광주에서 오는 4차선 도로 위를 버스는 쌩쌩 달렸다. 한 삼십여 분 흘렀을까. 시골 풍경이 점점 차창을 채우기 시작할 즈음 버스가 섰다. 버스를 탈 때 기사에게 초행길이니 남평역 인근에 세워달라고 밀 부탁을 해둔 터였다.

 

 

기사의 말대로라면 버스는 남평역까지 가지 않고 읍내로 곧장 간다고 했다. 역까지는 하루 두어 대의 버스만 드나드는데 그마저도 마을을 빙빙 에둘러 가니 남평읍에서 30분이나 넘게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읍내 가기 전 다리 앞 삼거리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남평역까진 3km 남짓한 거리지만 오뉴월 땡볕에 아스팔트길을 걷는다는 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분명 아니었다.

 

 

죽산 안씨의 재실이 있는 수청마을인가를 지나니 도로를 가로지른 마을숲이 기다랗게 들어왔다. 풍강마을의 우량숲이다. 그 이름만큼이나 우람한 느티나무와 팽나무, 서어나무 등 37주의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걸 태울 듯한 기세의 뜨거운 햇볕도 이곳에선 잠시 주춤했다.

 

 

굳게 닫힌 광촌분교를 지나니 멀리 빛바랜 청색 표지판이 길가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내리쬐는 뙤약볕에 너른 역 광장이 허연 생살을 무방비로 드러내고 있었고 광장 뒤편 가운데에 조성된 작은 화단에는 꽃과 나무들이 가득했다. 제법 오래된 둥치가 굵은 나무 사이로 파란 지붕에 하얀 벽면을 한 남평역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쁘다. 나도 모르게 절로 첫마디가 그렇게 나왔다. 광장 한쪽으론 장독대가 열을 지어 있고 중간 중간 조각품 같은 것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2012년 12월에 조성된 ‘티월드 갤러리’였다. 아! 그럼 역사 안이 전시공간으로 되어 있겠지, 하는 기대는 굳게 닫힌 문에 이르러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다만,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배경역, 전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간이역 남평역”이라고 적힌 나무 명패가 또렷이 다가왔을 뿐이었다.

 

 

 

 

남평역, 그러고 보니 기차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렀을 역이다. ‘사평역에서’를 한 번이라도 읽은 이라면 누구든 찾던 역이었다. 실상 사평역은 남광주역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이곳 남평역을 곽재구의 사평역으로 알고 있다. 사평역이란 결국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시에 나오는 상상의 공간임에도 사람들은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해야 의심을 거두고 만족할 줄 알게 된다. 불상이 없으니 부처를 믿을 수 없다고 해서 불상이 생긴 것과 다름없음이리라.

 

 

임철우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어 <사평역>이라는 소설을 썼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

 

 

곽재구가 시에서 읊은 곳은 전라선의 어느 후미진 간이역이다. 이 작은 역에서 그가 지핀 삶과 추억의 순간들은, 우리의 깊은 정서에 닿아 생생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적신다.

 

 

임철우는 또한 어떠한가? 곽재구의 시로 시작하는 소설은, 대합실에 놓인 난로의 불빛 속으로 톱밥을 던져 넣으며 생각에 잠긴 등장인물들의 삶의 장면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결국 산다는 건 무엇일까를 우리들에게 묻는다. 퇴학당한 가난한 대학생, 출감했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중년 사내, 평생을 농사지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농부, 술집 여자가 되어 고향을 찾은 춘심이, 돈을 훔쳐 달아난 사람을 찾으러 온 서울여자... 이들의 상처와 아픔, 상실감을 통해 삶이 어떠한지를 우리들에게 묻고 있는 셈이다.

 

 

애잔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느낌이 드는 두 작품은 ‘간이역의 대합실’과 ‘기차’라는 매개를 통해 결국 사람이 산다는 건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떠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나타난 완행열차는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 영락없이 우리네 인생을 닮았다.

 

 

시와 소설 속에 나오는 눈 내리는 풍경이 아닌, 오늘처럼 햇볕이 내리쬐는 대낮의 기차역에서 그 쓸쓸함과 아름다움의 느낌은 분명 다르겠지만, 인적 하나 없이 폐역이 된 이 정적 가득한 작은 간이역에 서니 문득 작품 속의 느낌이 조금은 와 닿는 듯했다.

 

 

 

역사와 승강장으로 이어지는 짧은 거리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예전엔 이 짧은 오솔길로 세상과 통했겠지? “대합실에 다람쥐가 드나들고 벚나무엔 딱따구리가 구멍을 뚫었다”는 옛 승무원의 말이 언뜻 동화 속 이야기처럼 떠올랐다.

 

 

 

역 한편에 250m 정도 되어 보이는 레일바이크가 있다. 폐역이 된 기차역을 활성화하고자 만들었겠지만 멈춘 지 오래된 듯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 역사 안을 기웃거렸다.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인 채 안을 들여다봤지만 햇빛에 반사된 유리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 역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을 아름드리나무 몇 그루와 누군가 톱밥을 던져 넣었을 녹슨 난로와 의자 하나가 하염없을 뿐이었다.

 

 

 

역을 떠나야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택시 한 대가 쏜살같이 역 광장으로 들어왔다. 남평읍에서 3km 남짓 겨우겨우 걸어 남평역에 왔지만 아무래도 땡볕을 계속 걷기는 무리였다.

 

 

남평역은 1930년 12월 25일에 영업을 시작했다. 지금의 역사는 1956년에 지은 것으로 2006년 12월에 등록문화재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 10월 5일에 여객 취급을 중지해 지금은 사람은 오르내리지 않고 하루 몇 차례 기차가 이곳을 지나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