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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애불

할머니를 닮은 석불, 우연은 아니었다

 

 

할머니를 닮은 석불, 우연은 아니었다.

 

터미널 주위는 화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에서 운주사 가는 178번, 182번 버스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길 건너편에선 광주 가는 버스가 연신 멈췄다 떠나기를 반복했다. 화순공공도서관 입구 편의점 앞에서 벽나리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벽나리로 곧장 가는 250번 버스가 막 지나가 버려서 20여 분을 기다린 끝에 252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평일인데도 버스는 만원이었다. 252번 버스는 읍내를 조금 에둘러 가서 벽나리까지 가는데 시간이 배나 걸렸다.

 

운 좋게도 마침 빈자리가 있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할아버지께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벽나리 민불을 보러 간다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여행자를 내려주라고 기사에게 부탁을 했다. 자리를 양보해준 고마움을 할아버지는 길안내로 갚고 있었다. “여기서 내려요.” 할아버지가 큰소리로 말했고 버스는 소방서 앞에서 멈췄다.

 

 

들판 가운데에 석불이 있었다. 정식 명칭은 화순대리석불입상이다. 수로를 따라 논두렁을 조심조심 건너 석불로 다가갔다. 석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아! 석불의 얼굴은 바로 아까 터미널에서 본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대리석불입상은 보성과 화순을 지나는 길목에 있다.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불상이 개인의 기복과 마을의 안녕을 비는 길거리에서 쉽게 대하는 불상이 되면서 ‘민불(民佛)’로 불리었다. 그 얼굴도 부처의 엄숙함에서 벗어나 민초들의 소박한 표정이 담겨 있다. 불교와 민간신앙이 섞인 형태로 그 생김새가 매우 친근하다. 석불과 할머니의 얼굴이 닮은 것은 어찌 보면 우연은 아니었다.

 

 

화순대리석불입상(전남문화재자료 제243호)은 문화유적이 많은 화순의 다른 지역과 달리 변변한 유물이 없어 다소 밋밋할 수 있는 화순 읍내에 홍일점과 같은 존재다. 화순읍에서 남쪽으로 경전선 철길이 달리는 논 한가운데에 있는 석불은 얼핏 보면 무슨 선돌로 보이기도 한다. 잘 자란 느티나무 두 그루를 일산삼아 서 있는 모습에서 사뭇 위엄까지 느껴진다.

 

 

가까이서 보니 석불은 제법 키가 크다. 멀리서의 위엄 있는 모습과는 달리 친근하고 해맑은 인상이다. 동그란 맨머리에 기름한 눈은 편안하다. 넓적한 코는 장승처럼 순박했고 일자형의 입은 도톰하니 작은 것이 순하다. 턱과 목이 구분되지 않고, 목 부분이 어깨로 바로 연결되어 돌기둥과 같은 느낌을 주는 조선시대 후기 돌장승에서 흔히 보는 양식이다.

 

 

석불은 돌기둥에 가까운 자연석을 사각형으로 대충 다듬은 뒤 앞쪽에 얼굴 부분만 돋을새김을 하고 나머지 턱 밑으로 내려온 몸체 부분은 선각으로 처리했다. 주변에 절터로 추정할 만한 곳은 없고 다만 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이 고장 출신인 진각국사(송광사 16국사중 제2세) 탄생설화와 관련된 학서정이 있을 뿐이다.

 

 

이 민불을 마을에선 ‘미륵’이라고 부른다. 미륵이라. 이곳에는 한 기가 있을 뿐이지만 인근의 운주사라는 절에 가면 수백 기의 미륵이 모여 있다. 아득한 신앙의 세계에 머물던 불교를 자기들의 생활 속으로 끌어와 신앙물인 ‘민불’에 의탁한 것이다. 말 그대로 백성들의 부처가 된 것이다.

 

 

비록 투박하여 근엄하고 외경의 대상이 아닐지라도 자기들의 삶터에 깊이 뿌리내려 마을의 안녕과 개인의 복을 빌어 그들만의 미륵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농사철이 되면 당산나무 아래 석불을 보며 새참도 먹었을 것이고 아이들은 이 둔덕을 놀이터삼아 뛰어다녔을 것이고 뜨거운 여름에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은 그 자체로 마을 사람들의 고단한 몸과 마을을 달래는 이미 작은 미륵세상이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