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사에 머물다

느닷없이 넋이 나갔던 산사의 설렌 풍경. 쌍봉사

 

 

 

 

느닷없이 넋이 나갔던 산사의 설렌 풍경. 화순 쌍봉사

 

 

산사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쌍봉사는 북적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초파일.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배낭에 넣어온 김밥이 문득 생각났다. 혹시나 싶어 가져왔는데 절밥도 못 얻어먹고 김밥으로 배를 채우게 생겼다.

 

 

쌍봉사에 와본 지는 벌써 십년이 훌쩍 넘었다. 작고 아담해서 절이라기보다는 집처럼 아늑했던 기억이 있다. 아주 평범하고 순한 구릉과 논들을 지나 느닷없이 나타난 산사는 당시 묘한 기대감과 설렘을 품게 했었다. 새로이 담장도 길게 이어지고 못 보던 전각도 몇 채 늘었다. 절집 담장 앞마당에 앉아 공양 대신 김밥을 먹었다. 염불소리는 높아만 가고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다.

 

 

 

천왕문을 지나자 입구부터 연등세계가 펼쳐진다. 터널 같이 둥글게 매달린 연등 너머로 3층 목탑이 보인다. 1984년에 불에 탄 후 1986년에 다시 지어진 목탑은 예스러운 맛은 덜하지만 쌍봉사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축물이다. 목탑을 한 바퀴 둘러보다 제각각 생긴 돌덩이들을 단정하게 쌓은 기다란 석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장전과 극락전에 올랐다. 지장전의 보살은 하나같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 묘사가 적나라하다. 어쩜 이리도 잘도 깎았는지, 장인의 내공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지장전의 목조지장보살상은 전남 유형문화재 제253호로 일괄 지정돼 있다.

 

 

 

금칠을 해 언뜻 보기에는 목조불로 보이지 않는 극락전의 목조불도 후덕하다. 극락전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전남 유형문화재 제253호다. 배흘림기둥의 그 천연덕스러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극락전도 3층 목탑이 탔을 때 피해를 입을 뻔했으나 수백 년 된 단풍나무가 불길을 막아 지켜냈다. 온몸으로 화마를 막아낸 단풍나무는 영광스런 상처를 드러낸 채 오늘도 당당히 법당에 오르는 불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북적대는 법당을 벗어나 철감선사 승탑 가는 길로 들어섰다. 우거진 대밭에선 초의선사의 선바람이 불어왔다.

 

 

북창 아래서 졸다가 깨어나니

은하수는 기울고 먼동이 터온다

에워싼 산은 가파르고도 깊은데

외딴 암자는 적막하고 한가하구나

밝은 달빛은 누대에 들어서고

바람은 산들산들 난간에서 인다

침침한 기운은 나무들을 감쌌고

찬 이슬은 대나무 마디에 흐르네

평소 조심했으나 끝내 어긋났으니

이런 때 맞으니 도리어 괴로워라

남들이야 이 심사를 알 리 없으니

싫어하고 의심함 사이 피할 길 없네

어찌 미연에 막지를 못 했던가

서리 밟는 지금 오한이 이는구나

보나니 동녘은 점차 밝아오고

새벽안개는 앞산에서 몰려온다.

 

- <한가윗날 새벽에 앉아서>, 초의선사가 짓고 정찬주가 옮기다

 

초의선사(1786~1866)가 최초로 쓴 시로 알려진 이 시는 초의선사가 쌍봉사로 와서 금담선사에게 참선을 익히던 중에 지은 시다. 1807년인 22세 때 한가윗날 새벽에 일어나 철감선사 승탑으로 가는 대나무숲길을 걸으며 자신을 되돌아보며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초의선사는 이후 해남 대둔사로 돌아가 다산 정약용에게 엄격한 시정신과 시작법을 배워 선풍이 감도는 절창의 시를 남긴다.

 

 

비탈에 담장을 두른 승탑에는 오랜 감나무 한 그루가 초입을 지키고 있었다. 노승을 시중드는 동자승처럼 오랜 세월 속에 나무도 속절없이 고목이 되었다. 철감선사는 798년(원성왕 14)에 태어나 18세에 출가했고 868년(경문왕 8)에 쌍봉사에서 입적했다.

 

 

쌍봉사라는 이름도 철감선사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다. 쌍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다.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 도윤이 창건하고 자신의 도호를 따 쌍봉사라 하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종풍을 이어받은 징효가 영월의 흥녕사(지금의 법흥사)에서 사자산문을 열었다. 생전에 그의 덕망이 널리 알려지자 경문왕은 그를 궁중으로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 그가 죽은 후에는 ‘철감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국보 제57호로 지정된 이 승탑은 8각 원당형의 기본형이다. 전체를 대강 눈대중으로 보고 각 부분을 살펴보느라 눈길이 절로 바빠진다. 필생의 작업으로 신앙적 발원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경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석조물임에도 목조건물의 형식까지 하나하나 표현된 조각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걸작을 보고 있노라니 숨이 멎는 듯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로 내버려두지 않고 새긴 세부는 지극히 화려하지만 전체는 장중한 느낌을 준다. 다만 상륜부가 없어지고 어느 때인가 상했을 지붕돌 추녀의 깨짐에 감동 이상의 아픔이 무겁게 저려온다.

 

 

바로 곁에 있는 철감선사탑비(보물 제170호)는 또한 어떠한가. 그 능청스러운 표정하며 왼발은 땅에 붙은 채로 막 걸음을 떼려 세 발가락을 살짝 든 오른발을 보면 금방이라도 뚜벅뚜벅 걸어 나올 태세다. 아주 생동감 있고 사실적인 조각이다. 사각의 바닥돌 위에 용의 머리를 한 거북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정수리에는 뿔을 나타낸 듯한 돌기가 있고 등껍질에는 두 겹으로 된 귀갑문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마치 귀부의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이따금 오가던 사람들의 발길도 뚝 끊겼다. 할아버지 한 분이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안내문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승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 긴 한숨소리에 여행자는 얼어붙는 듯했다. 천 년이 넘은 승탑과 할아버지는 이미 둘이 아닌 하나로 된 듯했다. 할아버지가 승탑을 떠나고 난 후에도 여행자는 한동안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승탑 주위를 맴돌았다. 위에서 보고 아래서 올려보고 옆으로 뉘어 보기를 몇 차례, 자꾸 돌아봐지는 고개를 애써 돌리며 승탑을 내려왔다. 승탑에서 내려와 너와정자에 홀로 앉았다. 앞산에서 몰려온 바람이 잠시 길을 잃고 정자에서 멈췄다. 구름이 높다.

 

 

오후가 되자 부처님 오신 날도 가고 있었다. 분주했던 절마당에도 하나둘 그림자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장전 앞에서 스님이 퀴즈를 내고 있었다. 어떤 문제를 아무도 못 맞추길래 슬며시 손을 들어 답을 했더니 예쁜 수첩과 염주를 선물로 줬다. 즐거운 일이다.

 

 

 

 

 

 

 

보살님께 버스 타는 곳을 물었더니 절 앞 삼거리로 가란다. 예정대로라면 2시 40분에 버스는 올 참이었다. 도로 건너 이불재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시간이 빠듯하여 정찬주 선생님은 다음에 뵙기로 했다.

 

 

변변한 정류장도 표지판도 없는 삼거리에 승객이라곤 단 세 명뿐이었다. 고운 양산을 쓴 도시 할머니 한 분과 이곳이 고향이라고 한 수더분한 40대 아주머니 그리고 여행자.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올 시각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자 동네 사람인 듯한 할머니가 전동차를 타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화는 이내 끝이 났다. 버스는 오지 않았고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도시 할머니는 혹시나 싶어 길가에 세운 몇몇 차를 자꾸 기웃거렸으나 번번이 허탕을 쳤다.

 

 

“절에 사람이 많이 줄었어. 작년 초파일에 주지스님이 바뀌어서 그렇나?” 

“어제하고 평일 날 많이 왔다 갔지 않았겠소.”

 

도시 할머니의 말에 동네 할머니가 무심코 대답을 했다. 여전히 버스는 오지 않았다.

 

 

3시하고도 한참이나 지났을 즈음, 저쪽 어귀에서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버스 한 대가 급히 달려온다. 218-1번 버스였다. 쌍봉사가 종점인 218-1번 버스는 이양, 능주, 화순을 거쳐 광주까지 가는 버스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요금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요. 얼른 타기나 하소. 지금 광주까지 다시 나가려면 시간이 없소이. 화장실도 못 가겠소.”

 

오늘 화순 축제 때문에 공설운동장에서 차가 꽉 밀려 늦었다는 기사는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일단 능주까지 버스로 가기로 했다. 오늘은 능주에서 1박을 할 참이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