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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또 하나의 일상

문서 하나를 보고 떠난 현대사 여행

문서 하나를 보고 떠난 현대사 여행
- 제적 등본에 나타난 가슴 아픈 한국 현대사

황매산에서 본 가회면 일대

아버지 49제를 마치고 가회면 소재지로 향했다. 며칠 전에 삼촌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와 형제임을 증명할 서류를 회사에 제출해야 하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할아버지 밑으로 다른 형제들은 있는데 아버지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리가 없을 거라며 동사무소에 확인하러 갔다. 삼촌과 형제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는 '제적등본(사망자와 분가자를 기재한 문서)' 밖에 없었다. '제적등본'을 유심히 살펴보다 나도 모르게 "어"하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 제적등본에 나타난 장남 기록

할아버지 '제적등본'에는 장남長男 00, 삼자參子 00, 사자四子 00 등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있는데, 이자(둘째아들)인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동사무소 직원은 "합천군 가회면의 호적관계 전산화는 2007년에 마무리 되었으니, 혹 전산작업 과정에서 누락될 수도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제가 가회면 사무소에 알아 보고 연락드릴께요."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동사무소에서 답변이 왔다. "가회면사무소에 알아 보니 6.25전쟁 때문이더군요. 1951년 8월 11일에 공비 침투로 가회면 사무소가 불탔다고 하네요. 부모님께선 그 전인 51년 3월에 결혼하여 분가를 한 상태이구요. 면사무소가 습격당하고 호적 등 모든 문서도 불타버렸답니다. 그후 57년 6월에 가회면에서 다시 호적관계를 정리했구요. 아버지께선 전쟁 전에 분가를 했기 때문에 57년 다시 게재될 때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할아버지 등본에 제외되었던 겁니다."

제적등본에 삼자, 사자는 있어도 이자인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적등본'을 자세히 보니 호적 멸실일이 1951년 8월 11일, 멸실사유는 공비 침범으로 되어 있었다. 마음이 착잡하였다. 이런 문서 하나에 한국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으니 말이다. 사실 고향인 합천을 위시한 서부 경남 일대는 해방 후 좌우 대립이 치열하였다. 어릴 적 자고 있으면 어른들끼리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잠결에 듣곤 했었다. 좌우대립, 인민군이야기, 보도 연맹 관련 민간인 학살 등 요즈음의 시각에서는 분명 납득이 되지 않는 끔찍한 일들이었다. 홉스봄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분명 '광기의 시대에 벌어진 광기의 역사'일 것이다. 가회면 사무소는 덕유산, 지리산 등 소백산맥과 이어지는 황매산이 있다. 지금은 철쭉제로 유명하지만 사실 황매산은 한국 현대사의 산 현장이다. 남에서 북으로 잇는 빨치산의 주요 이동 통로였다. 다만 마지막 빨치산인 정순덕의 회고에도 나와 있듯이 황매산은 숲이 많지 않은 민둥산이여서 빨치산 부대가 머물기에는 부적당한 장소였다. 남부군의 저자인 이태도 그렇게 적고 있다.

제적등본에 호적 멸실사유가 공비 침범으로 되어 있다.

나는 가회면 소재지에 들러 51년 8월의 면사무소와 지서로 돌아 갔다. 빨치산의 습격에 경찰은 독뫼산으로 후퇴했다. 독뫼산은 면소재지에서 구전마을(오리밭) 가는 길로 개천을 건너면 우뚝 솟은 자그마한 야산이다. 이곳에서 경찰들은 빨치산과 교전을 벌인 후 일부는 사망하고 일부는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아직도 가회지서를 습격한 이들이 빨치산이 아니라 인민군으로 알고 있다.

면사무소 뜰에는 '허면장 송덕비'가 있다. 이 분은 아직도 가회면민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가회면을 지나가던 무장경찰이 보도연맹관계자 백여 명을 합숙훈련이라는 명목으로 가회초등학교에 소집하여 집단학살하려 하였다. 주민 송씨가 허면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지서주임 조씨와 함께 허면장은 초등학교로 달려가 그 무고함을 울면서 호소하여 학살 직전에 모두 풀려나게 하였다. 이 사실은 인근 군에까지 알려져 당시 허면장에 대한 칭송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허면장은 일제시대에 현 영암사지의 석등(보물)을 일본인이 밤에 몰래 훔쳐가는 걸 주민들과 함께 의령군 대의까지 가서 다시 찾아 왔다. 가회중학교를 창립한 그는 "허면장 보리밭 매나마나"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면행정에 혼신을 다했던 분이었다.

잠시 이야기가 겉돌았는데, 그럼 본격적으로 남부군의 가회면 습격 사건을 '남부군'의 저자인 이태의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이태는 가회면 습격을 51년 8월 10일 경으로 적고 있다. 호적 멸시일이 8월 11일 임을 감안하면 비교적 정확한 기억으로 봐야겠다.

지금은 철쭉제로 이름난 황매산(1,104m)은 거창, 산청, 합천 등 세 군에 걸쳐 있다.

북진하는 연합군을 거슬려 남하하던 '조선인민유격대(일명 남부군)'는 51년 5월 중순경 덕유산 '송치골'에 거점을 잡았다. 송치골에서 이현상 주재하에 처음으로 '남한 6도 도당위원장 회의'가 열려 남한 전역의 빨치산 조직체계를 정비하였다. 그후 남부군은 황석산에 얼마간 머문 후 덕갈산을 거쳐 8월 10일경 합천군 황매산(1,104m)에 이르렀다. 남부군이 남하도중 가장 격렬하고 그들 입장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투가 8월 10일 경의 가회지서 습격전이었다.

가회면사무소와 허면장 송덕비

가회전투에는 전북 720부대, 충남 인부대와 붉은별부대, 315부대와 산청, 함양 군당 유격대 등이 합세하고 남부군 3개 부대가 주력인 총 7백여 정도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경찰측의 대비가 상당했던만큼 무기, 식량, 피복 등의 노획도 많았다. 7백 명의 남부군 부대원이 60밀리 포탄 2개씩을 나눠 졌는데도 포탄이 남아 폭파해 버리고 갔을 정도였다. 피복도 남부군이 새단장을 할 만큼 충분했으며, 수류탄 5~6개씩, 쌀 두 세말씩을 나눠 졌고 엠원 총탄도 휴대할 수 있는 데까지 휴대했는데 총 수량이 30만발 이었다고 한다.

황매산에서 본 가회면 일대(가운데 부분이 가회면소재지이고 논 가운데 작게 솟은 산이 독뫼이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가회전투 당시 배탈 때문에 짐맡는 일을 했다고 한다. 나무그늘에 앉아 그의 표현대로라면 전투를 서부영화 보듯 구경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난 후 가보니 백여 명의 전투경찰 포로들이 포로로 잡혀 있었다고 한다 (경찰 기록 56명). 이태가 본 것으로는 빨치산 전투 중 가장 많은 수의 경찰포로였다고 한다. 경찰포로들은 빨치산 룰에 따라 일종의 '서약'을 시킨 후 방면하였다고 한다.

독뫼산

이 가회지서 습격 전투에는 국군 제1비행단의 항공기까지 출격하였다. 항공기가 출격하자 빨치산 연합부대는잔여 물자를 태우고 황매산으로 황급히 철수하였다. 특이할 사항은 남부군 총참모장인 박종하가 중상을 입고 입석이라는 마을에서 8월 12일 죽었다는 것이다. 가회전투 후 입석이라는 마을에서 추격하는 경찰부대와의 작은 전투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박종하는 '강사령姜司令'이라고 불리며 낙동강에서 영웅 칭호를 2번이나 받았다는 빨치산 전투의 베테랑이었다고 한다. 훤칠한 키에 얼굴이 유난히 흰 미남인 그가 죽자, 많은 여자빨치산이 흐느끼며 울었다고 이태는 적고 있다. 훗날 지리산에서 부대를 개편하며 '박종하부대'라는 부대명을 붙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가회지서(왼편)과 독뫼산(가운데)

저자 이태는 이 전투에서 같은 부대의 박기서로 부터 얼마간의 돈을 건네 받는다. 박기서가 전사한 경찰관의 시체에서 얼마큼의 돈을 뒤져내 그중 몇백원을 자신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물론 박기서는 그 돈을 쓰지 못하고 그해 겨울 지리산에서 얼어 죽었다고 한다. 다만 이태는 후일 포로가 되었을 때 그 돈으로 호송하던 전경과 엿 몇 가락을 사서 같이 나눠 먹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빨치산 :  레닌이 처음으로 사용한 러시아어로 노동자, 농민으로 구성된 비정규군을 의미한다.

가회면에서 본 황매산과 모산재 자락(가회면은 영화 '학생부군신위'를 이곳에서 촬영할 정도로 유교 전통이 깊다.)

한국전쟁이 어느 마을인들 그냥 지나갔겠는가. 일제시대를 겪고 한국전쟁에 이어 다시 산업화와 군사독재에 시달린 우리네 부모들만큼 불운한 세대가 또 있을까. 빨치산 총사령관인 이현상과 토벌대장인 차일혁의 글을 끝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지리산의 풍운이 당흥동에 감도는데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온 길 천리로다.
언제 내 마음 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을까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끊는 피가 있도다.
                                                                                           -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한시 중에서-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
지리산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에게 물어봐라. 너희들은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자신있게 대답할 자 몇이나 있겠는가
                                                                                       -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이 남긴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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