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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

수원화성의 백미,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의 황홀한 야경

 

 

 

 

 

 

수원 화성의 백미,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의 황홀한 야경

이 풍경, 정조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나 화홍문으로 향했다. 술을 끊고 난 후 달라진 모습이다. 하릴없이 자리에 눙치고 앉아 있는 것보단 남들보다 한발 앞서 야경을 담는 것도 나을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삼각대로 한 컷 한 컷 담아야 하기에 그냥 휑하니 담는 것보단 시간도 많이 걸리겠으니 적어도 동행하는 이들에겐 피해는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수원에 몇 번 다녀갔었지만 야경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사진에 담고 싶은 욕심을 누를 길이 없었다. 삼각대까지 챙기고 천리 길을 나선 이유도 화성의 야경을 꼭 찍고 싶어서였다. 그중 오늘 촬영할 곳은 수원화성의 백미로 일컬을 수 있는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그리고 서장대다.

 

 

어둠이 내린 화홍문은 밝은 조명 아래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일곱 개의 무지개 문 아래로는 수원천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화홍문은 ‘북수문’이라고도 한다. 수원 화성을 가로 질러 남쪽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북쪽에 세운 수문이기 때문이다. 성내를 관통하는 수원천에 모두 7칸의 홍예문을 두었는데, 다양한 기능과 견고함에, 멋진 외관까지 함께 갖춘 북수문은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당대의 대표적 시설물이었다. 작년에 복원된 남수문이 남쪽의 수문이라면 화홍문은 북쪽의 수문인 셈이다.

 

 

정조는 이곳 화홍문 일대를 몹시 사랑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을 꼽으며 무지개다리에서 흘러내린 맑은 폭포수가 옥같이 부서지는 풍광을 즐겼다고 한다. 광교산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려와 화홍문의 일곱 개 홍예(무지개문)를 빠져나가는 물줄기인 ‘칠간수(七澗水)’가 옥처럼 부서지는 물보라를 바라보는 눈 맛이 그윽했으리라. 이와 더불어 ‘남제장류(南提長柳)’라 하여 수원천 긴 제방에 늘어선 수양버들의 아름다움 또한 그지없었다고 했으나 지금은 높은 제방에 가려 옛 정취를 느낄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화홍문을 보면 동시에 들어오는 풍경 하나, 방화수류정이다. 화홍문 동쪽 높은 벼랑 위에 세워진 방화수류정은 어느 방향에서 봐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방화수류정은 수원천 건너의 북동적대와 북동포루와 마주하며 이편에서 동북포루(각건대)와 함께 화홍문을 지키는 각루다. 동북각루로도 불리는 방화수류정은 높고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마치 공중에 떠있는 듯 아련한 곳에 지어졌다.

 

 

 

수원 화성의 4개 각루 중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방화수류정은 한국의 건축미와 정자문화가 마음껏 표현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정자다. 그 아름다움은 용연, 화홍문과 더불어 화성의 백미라고 부르기에도 손색이 없다. 누군가는 방화수류정을 일러 ‘꾸밈없이 자연스러운데다가 앙증맞다 할 만큼 작지만 그 자태가 단아하면서도 활달하며 격식에 구애됨 이 없고 재미나며 단조로움을 피한 것이 적당하니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와 같은 것은 없다’며 불규칙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평가했다.

 

 

 

방화수류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이자 시인인 정명도의 시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구름 개어 맑은 바람 부는 한낮 꽃 찾아 나선 길/ 버드나무 따라 앞 개울가를 지나네(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 시구처럼 구름이 사라지고 어둑어둑한 하늘에 맑은 빛이 보이더니 밝은 조명에 화려한 꽃처럼 피어난 방화수류정이 서서히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방화수류정은 전시에는 적군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기능을 하였으나, 평시에는 휴식공간으로 사용됐다. 화성 일대와 용연을 바라보며 느끼는 운치와 풍류로 따지자면 이만한 곳이 없었으리라. 방화수류정은 건축미로 보나 예술적 가치로 보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걸작임에 틀림없다.

 

 

 

정자에 오르면 수원성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로는 둥그런 연못인 ‘용연(龍淵)’이 있다. 예전 이곳에 용머리바위가 있어 용연이라 불렀다고 한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고 능수버들이 휘늘어져 있다.

 

 

 

빛을 받은 성벽 끝으로 동북포루가 우뚝 솟아 있다. 마치 거대한 용이 비틀거리며 용머리를 치켜세우는 양, 어둠 속에서도 당당하다. 그 너머로 연무대와 활터가 옛 역사를 기억해내며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어두침침한 북암문을 지나니 용연의 세계가 펼쳐진다.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있어 적이 알지 못하도록 낸 출입문을 뜻한다. 화성에는 모두 5개의 암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특히 화성에서 유일하게 벽돌로 좌우 성벽을 쌓았다.

 

 

 

암문을 벗어나면 용연이 발아래에 놓인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용연의 눈 맛이 그윽하다면 이곳에서 올려다보는 방화수류정의 풍광은 가히 으뜸이다. 하늘 가까이 아득한 곳에 정자가 있어 신선도 보면 탐내어 욕심이 일 선경이다. 이 아름다운 정취를 옛 사람들은 ‘용지대월(龍池待月)’이라 하여 수원팔경 중의 하나로 삼았다. 연못 가운데 섬의 나무와 꽃 사이로 떠오른 보름달이 수면 위에 비추어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그토록 아름다웠으리라. 오늘 보니 누이의 눈썹 같은 달이 하늘에도, 연못에도 떠 있었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용연은 화성을 대표하는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알았던 풍류와 전시에 대비했던 옛 선인들의 철저함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곳이 화성 내에서도 바로 이곳 일대다.

 

 

 

달이 높이 돋았다. 나뭇가지에 걸린 줄로만 알았던 달은 어느새 호수에 잠기고, 하늘에 매달렸는가 싶으면 어느새 정자 위에 걸려 있다. 연못 가운데의 둥근 섬에는 소나무 세 그루가 장하고 호숫가 둘레에는 버들가지가 연못에 드리워져 있다. 연못에 비친 방화수류정과 달그림자, 나무 그림자가 만들어낸 운치는 밤이 깊을수록 더해간다. 물에 비친 반영이 그려내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에 이따금 어둠을 뚫고 탄식 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이러한 아름다움으로 방화수류정은 군사적 기능보다는 풍류와 운치의 공간으로 알려져 왔다. 이 절정의 풍경을 만약 정조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이런 대명천지가 있을까. 이 휘황찬란한 불빛에서 그는 그의 꿈과 이상이 좌절된 것이 아니라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봤을 것이다.

 

 

 

☞ 방화수류정의 군사적 공식 명칭은 동북각루(東北角樓)다. 화성에는 모두 네 군데에 각루를 만들었는데, 서북각루, 동남각루, 서남각루(화양루), 동북각루(방화수류정)가 그것이다. 성의 굴곡부나 모퉁이, 돌출부 같은 요소에 지은 다락집을 ‘각루’ 혹은 ‘초루’라고 하며 짐승의 뿔처럼 튀어나온 땅 위에 높은 마루 집을 짓고 적들의 동정을 살피는 곳이며 총이나 포를 쏘기도 하는 요새다. 즉, 각루는 전망대와 감시초소의 기능을 겸하는 곳이다.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갑인년(1794) 9월 4일 터를 닦기 시작하여 10월 19일 완성하였으니 한 달 반 만에 공사를 마무리한 셈이다. 그러나 다른 각루들은 모두 그보다 2년 뒤인 병진년(1796)에 완성하여 방화수류정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서북각루가 그해 7월 9일, 서남각루인 화양루가 7월 20일, 동남각루가 7월 25일에 완성됐다. 그 비용도 방화수류정엔 5352냥 1전 2푼, 화양루 885냥 1전 2푼, 서북각루 411냥 8전 9푼, 동남각루 410냥 9푼이 들었다. 방화수류정은 화양루의 약 6배, 서북, 동남각루의 13배가 넘게 들었다. 그만큼 당시에도 방화수류정에 얼마나 많은 공과 정성을 쏟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적 제3호로 지정된 수원 화성에서 방화수류정이 보물 제1709호로 별도로 지정된 것만 봐도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도 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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